2003년 1분기에 기아차의 소형차인 리오와 중형차인 옵티마는 북미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카니발과 쏘렌토와 비교해 14~16%의 수익률 차이를 보였다. 이를 해소하려고 기아차는 납품업체를 옥죄었다. 기아차는 납품업체 34곳에 리오·옵티마의 부품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 대신 납품단가 인하로 발생한 손실을 카니발과 쏘렌토의 부품 단가 인상으로 보전해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납품업체들은 적게는 0.9%에서 많게는 29.9%까지 부품 단가를 내렸다.
현대·기아차는 2004년 기준 국내 시장점유율 73.8%를 기록했다. 또 국내 자동차 완성업체들이 해외에 판 자동차 가운데 77.8%를 차지했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의 납품액 가운데 70%(20조4224억원·2003년 기준)가 현대·기아차로 몰렸다. 자동차 부품업체에는 그야말로 ‘슈퍼 갑’인 셈이다.
납품업체는 벙어리 냉가슴
기아차는 문서로 손실 보전을 보장하지도 않은 채 부품 단가 인하부터 요구했지만 부품업체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리오·옵티마의 납품단가는 낮췄지만, 카니발·쏘렌토의 납품단가는 오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34개 부품업체들은 2003년 6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30개월여 동안 25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보면서도 납품업체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사실을 밝혀낼 때까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불평조차 못했다. 공정위가 2005년과 2006년 현장 직권조사를 벌여서야 기아차의 하도급법 위반 행위가 드러났다. 특히 공정위는 기아차가 손실 보전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거나 명시적인 합의를 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하청업체를 속였다는 ‘기만에 의한 하도급대금 결정 행위’라고 판단했다.
결국 공정위는 기아차에 34개 납품업체에 미정산 금액인 25억8519만원과 함께 지연이자(20억원)까지 더해 지급하고, 이런 시정 명령을 받은 사실을 기아차와 거래하는 모든 하청업체에 알릴 것을 명령했다.
이후 기아차는 밀린 대금을 일거에 지급하면서도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모든 하청업체에 시정 명령을 알리는 것은 가혹하다”며 서울고법에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은 대체로 공정위의 손을 들어주면서 다만 25개 업체에 대해선 기아차가 공정위 시정 명령 이전에 일부 손실을 보전해준 점을 들어 ‘기만에 의한 하도급 대금 결정 행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기아차는 여기에도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하도급 업체 폭넓게 보호하는 게 기본 방향”
하지만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는 서울고법보다 더 강도 높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4월29일 “상당히 우월한 거래상 지위에 있는 원고가 인하된 납품대금을 보전해 줄 경제적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에도 상당한 기간이 지나도록 그 전액을 보전해주지 않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일부 손실을 보전해준 25개 업체를 포함해 모두 기만에 의한 하도급 대금 결정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김영란 당시 대법관은 과의 통화에서 “중소기업인 하도급 업체를 폭넓게 보호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향이었다”며 “상식에 맞춰 판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는 지난 10월 280여 개 하청업체에 공정위로부터 시정 명령을 받은 사실을 알렸다. ‘슈퍼 갑’이 자신의 잘못을 법원의 판단에 따라 자복한 것이다.
심사위원 20자평정은순-약육강식은 우리가 택할 정답이 아니다
임지봉-부당한 하도급 관행으로부터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다
안진걸-중소기업을 위한 공정하고 의로운 판결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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