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인권을 옹호하는 살인 피해자 유족들’(Murder Victims for Human Rights)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살인 피해자 유족들로 이루어졌고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심지어 사형은 살인 가해자 유족들의 삶도 망가뜨린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 담론 참여를 북돋는 운동까지 하고 있다.
“딸의 죽음, 가해자 죽인다고 치유 안 돼”
총기 소유가 자유로워 그만큼 이유 없는 억울한 살인이 횡행하는 미국에서 이들은 왜 이런 활동을 하고 있을까. 지난주 우리 헌법재판소도 합헌을 선고하며 “사형은 정당한 응보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한다”면서 “자유형의 선고만으로는 형벌이 해당 범죄 및 범죄자의 책임에 미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피해자들의 가족 및 일반 국민의 정의 관념에도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고 판시하지 않았는가.
2001년,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던 19살의 외동딸이 살해당한 미국 윌콕스 부부(아마도 피해자의 사진을 본다면 여러분의 안타까움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의 말이다. “많은 이들이 사형제도를 피해자 유족의 이름으로 찬성한다. (중략) 심정적인 정리를 말하지만 그 정리가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치유는 우리 내부에서 올 것이지 살인자의 운명에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지 잘 모르겠다면 영화 을 상기해보라. 이 영화는 살인 피해자 유족의 치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주인공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신앙으로 치유하고 살인자를 용서함으로써 그 치유를 완성하려는 마지막 순간에 ‘차려고 하다가 먼저 차일 때’ 느끼는 약오름에 휘둘려 결국 실패하게 되지만, 그 치유는 내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지 살인자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7살 때인 2006년 부모가 살해당한 미국의 에릭 로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살인자에게 어울릴지는 몰라도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재판소장을 지내다 2000년 사망한 이스마일 마호메드는 다음 말을 남겼다. “방화에 대한 처벌로 방화범의 집을 불태울 수 없고 성폭행에 대한 처벌로 성폭행범을 성폭행할 수 없다면, 왜 살인에 대한 처벌로 살인자를 처단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남아공에는 성폭행과 살인이 많이 일어나지만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윌콕스 부부의 마지막 말이다. “사형이 범죄를 예방하고 생명을 구한다면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명확하지 않다.” 많은 찬반론들은 범죄억지력(또는 ‘일반적 예방효과’ 또는 ‘위하력’)에 대해 큰 견해차를 보여왔다. 이번 헌재 결정에서도 “인간의 생존 본능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까지 고려하면, 무기징역형 등 자유형보다 더 큰 위하력을 발휘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범죄억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사형제도의 위하력에 대해서는 ‘없다’는 내용의 연구보고서도 많아 사실 외국의 사형 찬성론자들도 대부분 일반적 예방 효과를 논거로서는 포기하고 있다.
헌재가 내세운 예방 효과는 근거 불분명
이런 측면에서 사형제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찬성론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아닌가 싶다. “누구도 자신의 살인 행위가 아무리 끔찍하고 극악하더라도 자신들은 죽음을 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해서는 아니된다.” 위하력이 실제로 있든 없든 ‘죽을 정도로 나쁜 일을 하면 죽을 수 있다’는 개인 책임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칙의 문제라면 반대편도 할 말이 있다. 영화평론 프로그램 의 진행자인 로저 이버트의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타인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지를 보면 어떻게 수많은 유럽인들이 유대인 대학살의 역사를 짊어지고도 편안히 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있다고 믿게 되면 벌써 ‘홀로코스트’에 반 정도는 다가간 것 아닌가?” 물론 유럽인들이 편안히 살고 있지는 않다.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사형제를 폐지했다.
살인자의 손에 부모를 잃은 로저스는 이런 말도 남겼다. “사람들에게 살인의 부당성을 살인을 함으로써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빅토르 위고는 “사형제도는 야만의 특수하고 영원한 상징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곳은 야만이 지배한다. 사형이 없는 곳에서 문명이 지배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사형이 원활히 집행되는 곳은 미국과 중국뿐이며 그 외에 제도가 존치되는 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뿐이다.
미국의 ‘야만’을 살펴보자. 미국 사회에서 가끔 발생하는 총기 난사의 주원인은 총기 규제의 부재이지, 교수 승진 시스템(2009년 2월12일 앨라배마주립대 비숍 교수 총기 난사 사건)도 가정교육(1999년 4월20일 컬럼바인고교 총기 난사 사건)도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하고 그러한 분노를 생산해내는 심리적 억압의 구조 역시 그러하다. 문제는 분노의 표출이 살인이라는 형태로 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총기 규제의 부재인 것이다. 이런 현실을 고착화하려는 극우 보수층의 의식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 수 있다’를 넘어서서 ‘위험 세력을 처단할 수 있다’는 원리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원리는 다시 사형제의 존재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결국 사형의 범죄억지력을 생각할 때는 폭력을 조장하는 효과도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형제의 존재가 일상생활에서 폭력을 부추긴다면 전쟁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형 반대론자들은 반전평화주의자인 것 같다. 물론 이들에게도 외세의 침략이나 타인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가 폭력을 동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위적인 생명의 종식이 정당한 경우도 분명 있다. 생명의 소중함을 유일한 반대 논거로 내세우는 보수적인 사형 반대론자들은 사형·낙태·안락사 모두를 반대할 수밖에 없지만, 을 쓴 로널드 드워킨의 견해를 빌리면 생명의 주체성- 삶이라는 소설을 쓰는 창조자로서의 주체성- 에 근거한 사형 반대론자들은 낙태와 안락사는 찬성할 수 있다.
사형 찬성하며 체제의 폭력 용인은 ‘위선’사형에는 일반적 예방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영원히 격리해 추가 범죄를 예방한다는 이른바 ‘특수 예방효과’도 있다. 하지만 이는 ‘가석방의 가능성이 없는 무기징역’으로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이번 헌재의 변론 과정에서 변호인단은 이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위헌이라는 고육지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응보와 범죄억지력에 의해 충분히 정당화된다고 보는 헌재에 대체 격리 수단의 존재에 근거한 사형 무용론은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헌재는 오판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판은 사법제도의 숙명적 한계”라며 사형 자체를 폐지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데, 사형의 불가역적 특성에 대답하지 않은 것은 이번 결정의 최대 취약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놀랍게도 사형 찬성론자이지만 (On Violence)에서 제도의 본질을 꿰뚫으며 용산 참사 1주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사형 반대론자들에게 중요한 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살인과 같은) 개별적 폭력에 대한 증오’를 사형제 찬성으로 표출하면서 정작 그런 주관적 폭력을 조장하는 ‘체제의 폭력성’을 용인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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