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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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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만도 못한 위정자들이여

용산참사 뒤에도 변한 것 거의 없는 재개발 관련 법·관행…
연산군의 ‘동절기 철거금지·선 대책마련’ 교지가 부럽다
등록 2010-01-05 15:49 수정 2020-05-03 04:25

용산 참사가 발생한 뒤 1년이 지나도록 정부·여당은 얼마나 많은 대책을 발표했을까? 세간의 평가는 ‘1년 내내 요란하게 대책을 발표했지만 실제 개선된 내용은 빈곤하다’는 것으로 모아지는 듯하다. 과연 그러한가?

용산 참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제2의 참사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2009년 1월 서울 응암 9구역 재개발 지구에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용산 참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제2의 참사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2009년 1월 서울 응암 9구역 재개발 지구에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정부, 참사 이후 단 한 번 대책 발표

‘정부·여당의 재개발 정책 발표 일지’(표 참조)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여당은 참사가 발생하고 20여 일이 지난 뒤인 2009년 2월10일 ‘용산 화재사고 관련 제도개선 방향’을 발표했다. 당시 발표한 세입자 대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가 세입자의 휴업보상금을 3개월분에서 4개월분으로 확대한다. 둘째, 조합원 분양 뒤 남은 상가는 세입자에게 우선 제공한다. 셋째, 조합이 부담하던 세입자 보상금을 건물주도 일부 부담한다. 다섯째, 순환개발제를 도입하고 도시분쟁조정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리고 주거 지원을 위한 중장기적 대책을 강구한다.

그리고 정부·여당은 입을 닫았다. 1년간 요란하게 대책을 발표했을 것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정부·여당은 사고 발생 직후 단 한 번의 대책을 발표한 뒤 철저하게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야 정치권에서 재개발 관련법인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시정비법)을 5차례 개정 발의했고, 많은 전문기관과 관련 단체들이 1년간 관련 제도를 개선하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하지만 여야 합의로 개정돼 2009년 11월28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도시정비법 및 그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2월10일자 정부 발표 내용과 사실상 똑같다.

정부·여당의 재개발 정책 발표 일지

정부·여당의 재개발 정책 발표 일지

서울시는 지주들 수익성 강조 정책만

진보·개혁 정당들조차도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높은 시기였음에도 정부·여당의 대책에서 한 발도 더 진척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여당의 오세훈 서울시장은 공공관리자 제도를 발표하면서, 용산 참사로 인해 제기된 ‘세입자에게 고통을 주는 재개발’에 대한 연초의 의제를 ‘지주들의 수익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는 재개발’ 문제로 희석시키고 사회적 관심사를 바꿔내는 데 성공했다.

“법을 위반했으면 철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절기 철거는 피하고, 철거 전에 집터를 마련해주라.”

이 문구는 어디에 나온 것일까? 개정된 도시정비법? 아니다. 조선 왕조의 최대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 500년 전(1503년 11월6일)에 내린 교지다.

그렇다면 6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가로 개정된 도시정비법은 어느 정도나 개선됐을까?

세입자의 권리와 관련해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상가 세입자의 휴업보상금이 3개월분에서 4개월분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상권이 발달해 권리금만 억대인 역세권 용산 4구역의 3개월치 휴업보상금이 평균 2500만원대에 불과한 점에 비춰보면, 4개월치로 약간 늘어난다고 해서 분쟁이 해결되리라고 예상하는 건 난망하다. 특히 영업손실 보상액의 산출 내역을 당사자인 세입자에게 공개하지 않는 한, 보상액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해소할 수 없다.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이 싸움 초기부터 요구한 것은 보상액의 근거 자료 공개였다.

또한 지주인 조합원에게 상가를 분양하고 남은 물량을 세입자에게 분양해준다는 분양권리나, 세입자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분쟁조정위원회 구성 등은 허울에 불과하다. 조합이 위반하더라도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 순환정비와 임시 수용시설 조항은 사실상 권고 조항에 불과하다.

세입자의 손실 보상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조합의 일방적인 퇴거 및 명도 조치를 제한한 법 제49조 6항의 개정 조항은 그나마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이 이뤄낸 가장 큰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조항이 개정되기 전에는 관리처분인가라는 행정 절차만 통과하면 세입자에게 어떠한 보상을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도 조합이 강제로 퇴거 조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개정 조항도 안전장치로는 미흡한 편이다. 조합이 아니라 땅 주인이 직접 세입자를 상대로 명도소송을 하면 언제든지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용산 4구역에선 이 방법으로 세입자를 하나둘 강제 퇴거시키고 있다.

도시정비법 내 세입자 관련 조항의 개정 내용

도시정비법 내 세입자 관련 조항의 개정 내용

용산 참사로 인해 제도가 개선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크게 후퇴한 부분도 있다. 세입자에게 주거이전비나 영업손실보상이 주어지면, 그 세입자를 둔 지주의 감정평가액을 그만큼 공제할 수도 있는 조항(법 제48조 제5항 2호)이 신설됐다. 가옥주가 세입자를 미리 한꺼번에 내쫓아버리도록 독촉하는 조항이나 마찬가지다. 이로써 앞서 개선된 조항은 유명무실해졌다. 이 조항으로 인해 전국의 재개발 지역에선 사업이 진척되기도 전에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자신의 감정평가액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가옥주들이 임대차 재계약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례 무시한 채 세입자에 불리한 시행규칙도

자신감을 되찾은 정부·여당은 세입자의 주거이전비 지급 기준일을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공고일로 못박은 시행규칙마저 발표했다. 이후에 들어온 세입자에게는 이전비를 안 줘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까지는 명확한 법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조합들이 관행적으로 공람공고일을 기준으로 삼아왔는데, 이를 법제화한 것이다. 하지만 공람공고일 이후에 세를 얻은 서울시내 40여 개 정비구역의 300여 세입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잇따라 ‘공람공고 이후 단계인 사업시행 인가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들어온 세입자에게는 주거이전비를 지급하라’고 세입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시행규칙은 법원의 판결 취지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500년 전의 연산군은 역대 조선임금 중 왕권 강화와 도로 건설을 위해 가장 많은 철거 정책을 편 왕으로 알려져 있다. 에 기록된 그의 토지정책 중 무려 70%가 왕권 강화와 경관을 위한 철거 정책이었다(‘조선 전기 도시 토지이용 정책의 가치’, 김흥순, 2009). 문제는 조선 최고의 ‘굴착 정권’이던 500년 전의 폭군조차 당연시한 ‘동절기 철거 금지’와 ‘선 대책 후 철거’가 지금은 목숨을 건 요구 사항이 되었다는 점이다. 개정된 도시정비법에서도 연산군의 교지는 찾아볼 수 없다.

백준 J&K도시정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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