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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표준어 경상도 말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익숙하지 않은 국회의원들도 자연스럽게 배워… 영남 출신 남성은 사투리를 못 고치는 게 아니라 안 고치는 것

이 기사는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18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지금도 실생활에서 부산 사투리를 가끔씩 툭툭 던지고 있는 이태희 기자가 썼다. 이 기자는 1995년 10월부터 시작된 본인의 기자 생활 도중 사투리와 관련해 직접 겪은 바와 들은 바들을 약간의 편견과 함께 정리했다. 이 기사를 쓰면서, 이 기자는 ‘나는 왜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을까’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 이태희 기자hermes@hani.co.kr

2004년 10월2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장이었다.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해찬 총리가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고 독설을 퍼부은 직후였다. 김용갑 의원(경남 밀양 태생)이 의원들 앞에 나섰다. “이해찬이가 상직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강재섭 의원(경북 의성 태생)이 말을 받았다. “가가 점수를 많이 땄다카이. 천정배하고 충성경쟁 벌이는 거 아이가. 노무현이한테 잘 보일라꼬.” 기가 오른 김용갑 의원이 “확 (노 정권을) 디비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비뿌라가 무슨 뜻인가요?”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수도권 출신 의원이 흐름을 끊었다. “그 말 뜻이 뭡니까. 확 죽이라는 뜻인가요?” 좌중에선 폭소가 터져나왔다. 질문한 의원의 표정은 진지했다. 결국 아나운서 출신의 한선교 의원이 ‘확 뒤집어버리라는 뜻’이라고 통역해주는 것으로 해프닝은 끝났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다. 국회 상임위에서도 보통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은 의원들도 이런 ‘교육’ 과정을 거쳐 사투리를 배운다. 한나라당의 표준어는 경상도 사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남 출신으로 한나라당을 출입한 어떤 기자는 당직자 회의를 취재하면서 70%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해 선배한테 질책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구전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호남 출신 의원들이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통합민주당에서 호남 사투리를 듣게 되는 일이 거의 없다. 걸쭉한 호남 사투리의 대명사인 ‘벌교’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서갑원 의원(전남 순천 태생)도 거의 쓰지 않는다. 여수시장 출신인 주승용 의원이 가끔 쓰는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지둘러’(‘기다려’의 전북 사투리)라는 별명을 가진 김원길 전 국회의장 정도다.

김 전 의장 연배의 정치인들은 표준어를 쓰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영남과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시절의 영향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이뤄진 정치였기에 진한 사투리는 필수였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와 권노갑 전 고문 등이 대표적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종횡으로 오가는 문화방송 라디오 정치 드라마 의 담당 PD에게 물어봤다. 정치인들의 어투와 사투리를 가장 많이 연구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오성수 PD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녹음한 자료를 잘 들어보면 영남 쪽 의원들은 의원총회 등 내부회의부터 국회 상임위까지 대부분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호남 쪽 의원들은 사투리를 잘 쓰지 않는다”며 “영남 사투리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부터 공개적인 장소에서 써도 상관없었지만, 호남 사투리는 DJ 정부 때 잠시 쓰다 말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는 “영남 쪽 의원들은 상관없지만 호남 쪽 의원들의 배역은 반드시 호남 출신 성우에게 맡긴다”며 “경상도 사투리는 성우들이 웬만하면 흉내를 내지만, 호남 사투리는 쉽게 흉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상도 사투리는 넘치지만, 호남 사투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권력층의 표준어는 경상도 사투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투리의 권력성은 모방을 낳는다. 법조인들의 신상정보를 모은 의 1997년 이전판을 보면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되어 있다.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는 없다. 97년 첫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그가 국민의 정부 첫 법무장관이 된 이후의 을 보면 고향이 전남 장흥군으로 바뀌어 있다. 광주고를 졸업했다는 정보도 비로소 나타난다. 언뜻 보면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 거짓 정보를 밝혔던 것처럼 보인다. 그건 아니다. 그는 부산 출신이 맞다. 다만, 전남 장흥군 ‘부산’면 출신이다. 그러나 김 전 법무장관은 ‘부산식’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고 그를 아는 기자들은 증언한다. 아직도 그가 부산직할시 출신이라는 기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2008년 2월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이들은 성우나 개그맨들이 성대모사를 하기 가장 쉬운 대상으로 꼽는다. 사투리와 어투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사투리는 ‘자신의 지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경상도 말 쓰는 전남 출신 비서관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고향은 전남 목포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고 한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전해철 비서관이 전남 출신인 것을 알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만났더니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놀랐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 경남 마산에서 공부했다고 사투리를 쓴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참여정부도 알고 보면 사투리 정권, 부산 정권이었다. 정권 초기 부산 출신의 청와대 비서관·행정관들은 공공연히 ‘부산 정권’이라는 말을 썼다.

경상도 사투리가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 1997년 12월22일쯤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당선으로 사상 첫 ‘정권 교체’가 이뤄진 지 나흘 뒤의 일이다. 당시 외무부(외교통상부의 옛 이름) 기자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방송기자가 이런 예언을 했다. “이제 방송 드라마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아주 심하게 쓰는, 비열한 깡패나 사기꾼이 등장할 거야. 지금까지 그런 역할은 모두 전라도 사투리를 썼거든.” 예언은 곧 현실화됐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드라마는 문화방송의 였다. 최진실, 박상원, 차인표, 송승헌, 최불암 그리고 김혜자까지 지금 봐도 ‘별’들이 가득한 드라마였다. 배경은 서울과 경북 울진군 후포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출연자는 없었다. 정권이 교체된 직후, 드라마에서 이경진이 연기하던 비련의 주인공인 ‘계순이’의 서울 분식집 옆으로 한 부부가 이사왔다. 부산 출신이라는 이 부부는 사투리를 심하게 썼다. 계순에게 온갖 괴로움을 안겨주다 결국 사기를 치고 도망가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었다. 사람들은 부산 사투리를 쓰는 그 부부를 욕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물론, 영남 출신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북이 고향인 와이프는…”

그러나 2001년 부산 사투리는 영화 를 통해 ‘의리의 언어’로 복권됐다. ‘친구 아이가’라는 억센 말 한 토막은 ‘우리가 남이가’ 이상의 정치적 파괴력을 가졌다.

기자의 고등학교 동기인, 대기업의 12년차 과장은 술을 마시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만히 보니, 부산에서 태어난 우리는 언어부터 특혜를 받았더라. 내가 부산 사투리를 쓸 때 한 번도 주변을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북이 고향인 우리 와이프는 지금도 사투리를 쓸까봐 엄청 신경쓴다고 하더라.”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으로 ‘유학’온 지방 출신들 중에서 사투리를 잘 못 고치는 집단이 영남 출신 남성들이다. 여성들은 출신 지역을 불문하고 사투리를 잘 고친다. 사투리를 쓰면 ‘격’이 떨어진다고 보는 통념 때문이다. 나머지 지역 출신들은 억양이 강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4년의 대학생활을 거치면서 대부분 서울 표준어로 ‘투항’한다.

결론은, 영남 출신 남성은 사투리를 고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력의 표준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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