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몰입 교육’이란 이름의 얼치기 글로벌리즘, 야심있는 지도자라면 자기 언어 부끄러워 말아야
▣ 함돈균 문학평론가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이란 강대국의 말을 열심히 배워야 살 수 있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이 운명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해서, 때로 우리는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주 의식의 산물에까지 이 힘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조선말과 조선글자를 일치시키겠다며 만든 훈민정음이, 오히려 중국 발음을 이상적인 발음으로 상정하고 이를 실현시키려는 표기원칙을 제시하는 일이 이런 예 중 하나라 하겠다(‘중국’을 ‘듕귁’으로 발음하라는 동국정운식 표기원칙이 이것이다).
이는 우리 문자의 어떤 면을 폄하하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약소국의 운명과 이것이 배태하는 순응적 삶의 관성은 문화적 무의식의 뿌리를 점령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의 말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실상 ‘모어’(母語)의 지위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의 식민화 상황은 삶의 식민화와 다를 바 없는 사태를 낳곤 한다. 여기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언어와 사유 간의 소외 상황이 심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자기 사유를 담는 모어의 지위는 지극히 격하되는 반면, 자기 사유와 무관하게 힘을 가진 강대국의 언어는 물신화돼, 남의 나라 말이 아무런 내용도 없이 ‘신성한 기호’로 현성해 현실에서 전능한 힘을 얻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민족대학’도 ‘글로벌’하게 영어 강의
한국사의 주요 지배세력들의 일단의 출세 사례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원나라가 위세를 떨치던 13세기 고려 권문세족에는 몽고어 역관 출신이 많았고, 조선의 주요 개국세력인 조준이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 말을 잘하던 유명한 역관 집안 출신이었으며,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조선 부호들 중에는 다시 변한 세상에서 만주어 통역을 하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역관들이 많았다.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사 어디에도 특별한 자료가 없는 별 볼일 없던 이인직이 한일병합을 사실상 주도하고, 와 같은 친일 신문의 주필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도, 이완용조차 잘할 줄 모르던 일본어를 그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광용의 에는 ‘일본어-소련어-영어’로의 변신을 통해, 일제시대-인공 시절-1950년대 이후를 초인적으로 살아나오는 카멜레온적 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들은 더 이상 ‘반역사적’ 풍자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조차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글로벌’ 시대에, 철저히 강대국의 언어만으로 자신의 생존전략을 극대화한 그들은 오히려 ‘글로벌 선구자’들로 재평가돼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세상은 ‘민족대학’을 전통적 상징으로 외치던 국내의 한 유명 대학조차 ‘글로벌 프라이드’로 모토를 변경한 지 오래된 시대가 되었다. 이 ‘글로벌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 이른바 ‘영어 강의’다. 단지 영문과에서의 영어 강의가 아니라,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강의에 의무적으로 영어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으며, 신임교수는 영어 강의를 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만 교수 임용 자격이 주어지는 학교들이 늘어가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를 하며 사는 나 역시 앞으로 전임교수가 되려면 이 서약서를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난 도무지 내 전공을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어떻게 글로벌하게 발음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이 민요조의 율격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대 한국어로도 번역이 쉽지 않은 의 수많은 고전어들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서 수업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에 나오는 수많은 사투리나 해학과 풍자로 넘쳐나는 민중적 어법들, 자진모리·중모리·휘모리로 이어지는 그 숨가쁘며 때로는 유장한 우리말의 호흡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낭독하고 번역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륀지’ 요구하는 반지성적 흐름
뜻글자(표의문자)로 이루어진 한문학을 어떻게 소리글자(표음문자)인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도 난감하다. 예컨대 ‘道’는 ‘road’(길)인가 ‘law’(법)인가, ‘logic’(논리)인가 ‘principle’(원리)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do’로 번역해야 하는가?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흔들며 다의성을 증폭시키는 김수영 시의 그 모호하고 격렬한 언어의 정치성을 도대체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촌스러운 나는 한국말로는 쉽게 떠오르는 서정주 시의 마술적 이미지와 토착적 방언의 세계가 도무지 글로벌 스탠더드화돼서는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 능력에 관한 한 현재에도 앞으로도 전혀 가망이 없다.
바야흐로 ‘최고경영자(CEO) 총장’ 시대다. 대학은 이제 학문이나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장사꾼들의 천박한 시장논리가 대단한 선진 정책인 양 거짓 선전되고 또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먹히는 시장통이 돼가고 있다. 평생 토목건축업에 종사하며 부동산과 주식으로 부를 축적한 대통령 당선자가, 새 건물 짓기와 대학기금 마련 같은 것을 학문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신과 비슷한 CEO 총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 인수위원장이 주도가 된 얼치기 글로벌리즘이 과목 불문의 ‘영어 몰입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 교육현장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던 찰나에 간신히 ‘유보’됐다. 말의 식민화가 삶의 식민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 우리 역사의 뼈아픈 사례이긴 하지만, 21세기에 이러한 사례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인 심화의 모습을 보는 심정은 비통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무슨 민족주의적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이러한 말의 식민화가 말과 사유의 괴리를 부추기며, 내용 없는 껍데기 언어의 물신성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정책은 사고의 심도를 높이고 지적 시야를 넓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관심이 아니라, ‘오렌지’를 ‘아륀지’로 발음할 줄 아는 기업형 인간이 필요하다는 ‘글로벌 장사꾼들’의 요구 이상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대한민국은 사물에 대한 복합적 사고와 세계에 대해 성찰적 시야를 열어주는 깊이 있는 독서가 아니라, 토익·텝스 시험을 위해 자신들보다도 훨씬 일천한 교양 수준을 지닌 원어민 영어 강사들에게 쩔쩔매고 매달리면서 소모되고 있다. 이 현상이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지적 깊이를 현저히 ‘얇고 평평하게’ 하는 반지성적 흐름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는가
그리스어와 계보가 연결돼 있지 않은 독일어는 원래 유럽어 중에 가장 ‘미개한’ 궁벽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 ‘시골말’을 통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유 능력을 보여준 것이 괴테나 칸트,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같은 지적 거인들이었다. 그들 때문에 독일어는 세계적인 언어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야심 있는 지도자라면, 자기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강대국의 언어를 맹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로 이루어진 지적 문화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말로 된 책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번역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말의 지위를 세계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적 식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여,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시는가? 이미 오래전에 잿더미가 된 것은 당신들의 사고요, 우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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