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모임·노골적 선동·선거법 위반한 교우회보… 고려대 교우회는 선거운동 중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민족명문 사학에서, 대통령 한번 내보겠다는 열의가 높은 것 같습니다. 강연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주문이 없었지만 눈치껏 알고 말하겠습니다.”
12월5일 오후 5시30분 서울 종암동 고려대 교우회관 안암홀. 연단에 선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강연 첫 발언은 ‘민족명문 사학’과 ‘대통령’이었다. 박 전 의장은 이어 1시간 동안 열띤 ‘선동’을 펼쳤다. “이명박 후보는 실적이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일 후보다.” “이명박 후보가 실패하면 한나라당은 삼수 실패, 불임 정당이 된다.” “이명박 후보가 적당히 이겨선 안 된다. 압승해야 한다.” “이회창씨는 절대 살신성인하고 양보할 사람이 아니다.” “끼리끼리 교우들만 만날 게 아니라 이회창을 찍겠다는 이들을 만나 설득해야 옳게 선거운동하는 거다.”
△올 1월5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열린 고려대 교우회 100주년 기념 신년행사에 참석한 이명박 후보가 참석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1500여 명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왼쪽부터 김승유 고려대 경영대 교우회장, 오세훈 서울시장, 현승종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이명박 후보, 박종구 전 교우회장, 어윤대 전 총장, 정규일 교우, 이필상 전 총장, 권오을 한나라당 의원. (사진/ 뉴시스 남광호)
언뜻 한나라당 당원 집회로 보인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연설을 듣고 있는 250여 명의 사람들은 고려대 기독교우회(회장 원광기 목사) 회원들이다. 연단 옆에는 고려대 교우회 천신일 회장(세중나모여행 대표)과 고려대 경영대 교우회 김승유 회장(하나금융지주 회장) 명의의 화환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은 이명박 후보와 고려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다.
‘고려대’와 ‘기독교’ 시너지 터진 날
박 전 의장의 연설은 고려대 기독교우회 성탄모임의 사전행사로 소개됐다. 이를 주최한 ‘다락방포럼’은 올해 만들어진 구국기도모임으로 고려대 교우회 인사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박 전 의장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다락방포럼 두상걸 대표(전 고려대 기독교우회 회장) 인사말은 다음과 같았다. “제 뒤를 이어 회장을 맡아 시장을 하면서도 노력해오신 그분, 그러다 대선 전 그만두신 그분, 마침 12월19일이 생일이라고도 하고 결혼기념일이라고도 하는 그분, 그분을 위해 우리 모두 일당백, 일당천, 일당만의 노력으로 이 민족 이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합시다.”
이명박 후보는 2001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6년간 고려대 기독교우회 회장을 지냈다. 이날 행사는 교우회 홈페이지의 행사 알림난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좌석마다 놓인 투표 참여 독려 유인물에는 이 후보의 이름 석 자는 없었지만 그의 구호 ‘국민성공 시대’가 굵은 글씨로 인쇄돼 있었다. 행사에 참석한 70대 박아무개씨는 “저녁 한 끼 먹는다고 연락받고 왔는데 난데없이 이명박 지지 강연을 해서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어느 집단보다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고려대’와 어느 집단보다 응집력이 강한 ‘기독교’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현장이었다.
같은 날 저녁 중국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퓨전 레스토랑. 오후 6시를 좀 넘기자 잘 차려입은 이들이 안쪽 연회실로 속속 모여들었다. 고려대 교우회 베이징지부(회장 구천서)의 경제학과·농업경제학과 합동 모임이다. 문밖으로 큰 웃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베이징 거주 고려대 교우들은 200여 명가량으로, 그중 30~40명은 한 달에 한 차례씩 모임을 갖는다. 이날 모임 연락을 맡은 이필주 베이징지부 총무부회장은 최근 결성된 베이징의 한 이명박 지지모임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지역 교우회가 ‘이명박 좋아하는 모임’
고려대 안팎에서, 나라 안팎에서 고려대 졸업생들의 모임이 부쩍 잦다. 단과대별, 학번별, 동아리별 모임이 촘촘히 만들어져 있는 고려대 교우회(고려대 출신들은 동문이라고 하지 않고,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라는 뜻의 ‘교우’라고 부른다)가 여느 대학 동문회보다 활성화돼 있기도 하지만,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 각 지부 창립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명박 후보 지지를 위해 ‘급조’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실제 일부 지역 교우회에서는 ‘이명박을 좋아하는 모임’이나 ‘이명박과 함께하는 ○○포럼’ 등을 소모임 이름으로 내걸었다.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거주하는 ㅈ씨는 최근 고려대 교우회 아현동 모임 통보를 받았다. ㅈ씨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ㄴ씨는 “갑자기 80년대 학번 과장(학생회장) 모임 연락이 와서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려대 출신들이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한다’는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고 있다. 서울 성동구 교우모임에서 활동하는 이승훈(공대 93학번)씨는 “우리만 떳떳하면 되지 않냐고 하기도 하는데, 괜한 잡음이 날까봐 모임을 대선 뒤로 미뤘다”고 말했다. 이씨는 “내 휴대전화 뒷번호가 1905(고려대 설립연도)인데 우리 과 50명 중 10명은 이 번호를 쓴다”며 “고려대가 잘 뭉치고, 이명박 후보가 고려대 출신이라 언론들이 자꾸 이를 연관지으니 의혹의 눈길이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대 교우회가 눈총을 받는 이유는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는 우스개처럼 잘 뭉쳐서만은 아닌 것 같다. 경기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졸업생 ㅇ씨는 최근 교우회 모임에 나갔다가 기분을 크게 상했다고 했다. “잘 놀던 중에 모임을 주도한 한 녀석이 선배 한 분이 술값을 내주러 오셨다고 소개했다. 잘 모르는 다른 단과대 선배였다. 비싼 양주를 시켜서 난처하기도 했지만, 거나하게 취하자 ‘고대 권력’이니 ‘이명박이 대통령 돼야 고대가 발전한다’는 얘기를 자꾸 했다. 차라리 한나라당에 가서 선거운동을 하지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들을 붙잡고 저러는가 싶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 고려대 출신 인사는 “지난해 올해 교우회가 제2의 한나라당이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라며 “몇몇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들이 이명박 후보 지지에 앞장서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대 교우회의 한 관계자는 “정치도 결국 인맥으로 하는 건데, 학연에 기대기는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라며 “이명박 후보는 알려진 것보다는 오히려 고려대와 연관을 안 짓는 편”이라고 말했다.
낯뜨거운 찬양에 이회창 비난까지
그러나 고려대 교우회는 이미 선관위의 ‘경고’를 받은 데 이어 현재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지난 11월 고려대 교우회는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한 기사를 에 반복적으로 실어 선관위의 ‘선거법 준수 요청’을 받았다.
올해 들어 7~8차례 이 후보의 동정과 업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는 대선을 코앞에 둔 11월호에서는 “콘크리트 정글 같은 서울을 푸른 오아시스로…불도저 산업역군이 세계적 환경전문가로 거듭나다”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이 이 후보를 환경영웅으로 선정했다는 내용을 두 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기사의 표현도 낯뜨거운 찬양 일색이다. “(은) 이명박 교우에 대해 힘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CEO로 성장한 바 있고 현재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점도 집중 조명했다.” “이 이명박 교우의 서울시장 당시의 친환경 대책에 대해 극찬한 바 있다.” 이 특집 기사와 나란히 실린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의 특별기고는 “일부 국민의 지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탈당해서 무소속 후보로 나서는 작태는 한국 정치사가 어렵게 이룩해온 정당정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이회창 후보를 비판했다.
선거법 93조는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된 인쇄물을 배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려대 교우회는 그 뒤에도 문제의 교우회보 11월호를 평소보다 많이 찍어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에게까지 뿌렸다. 선거법 95조는 신문·잡지, 기관지 등을 통상의 방법 외로 배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고려대 교우회는 이에 대해 “올해가 고려대 교우회 100주년이라 발행 부수를 늘렸다”고 해명했으나, 선관위는 “통상적인 교우 동정을 알리는 정도를 넘어서 지면이 할애됐고 통상의 방법과 달리 배포됐다”면서 “선거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라고 밝혔다.
박관용 전 의장 연설은 선거법 위반
선관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고려대 교우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앞서 박관용 전 의장의 연설도 선관위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선거운동 기간에 동창회를 열 수 있고 누구나 선거운동도 할 수 있지만, 옥내 집회에서 확성기 등을 이용해 연설을 하는 것은 선거법상 제한돼 있다. 주최 쪽의 허락을 받아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이는 후보자나 후보자 연설원으로 등록된 사람뿐이다. 박관용 전 의장은 선관위에 이 후보의 연설원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명박 후보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61회’(고려대 각 학과 61학번 가운데 재계·금융계·관계·정계·언론계 진출 인사들의 친목 모임)를 잘 아는 한 인사는 고려대 교우들의 이명박 지지 움직임을 “알아서 설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친구가 대통령이야’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런다. 누가 돈 주는 것도, 이명박이가 부탁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밥 사고 술 사고 별짓 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려대가 다 달려들어서 이명박이 편드는 것처럼 소문이 난다. 별로 실속도 없는데 말이다.”
30여 명이 활동하는 61회는 한때 동시에 국회의원이 12명이라 “원내 교섭단체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고려대 교우회 안에서도 ‘막강 파워’를 자랑한다. 이명박 후보를 비롯해 천신일·김승유 회장, 김덕규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오홍근 전 국정홍보처장, 김화남 전 경찰청장, 조한천·김충조 전 의원,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으로 정치적 스펙트럼도 넓다.
지난 4월 교우회장에 뽑힌 천신일 회장이 그와 경합을 벌이던 김중권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추천 단계에서 ‘제친’ 것도 김 전 비서실장이 고려대 법대를 나온 뒤 서울대 법대에서 석사를 했기 때문에 ‘순도’가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61회의 파워를 등에 업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더 많았다. 61회는 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나 점심을 함께 하는데 이명박 후보도 올봄까지는 꾸준히 참석해왔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긴 듯하다. 61회에 최근 ‘수상한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61학번이나 그동안 61회에 끼지 못했던 경제인들이 주축이 된 ‘녹우회’가 지난 여름 61회와 슬쩍 통합을 한 것이다. 고대 출신 경제인들의 모임인 고대경제인회는 노골적인 이명박 지지 세력이다. 고대경제인회 김명하 회장은 고려대 교우회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도 맡고 있는데, 12월5일 강연을 한 박관용 전 의장은 “김명하 회장이 나를 초청했다”고 밝혔다. 박 전 의장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배타적 행동은 배타적 특권으로
이명박 후보에 연루된 여러 의혹에 사실상 면죄부를 준 검찰의 BBK 사건 수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천신일 교우회장이 대표로 있는 세중나모여행의 주가가 2.02% 상승했다. 다음날 아침에는 8.15% 훌쩍 뛰어 연초 대비 42.1%의 상승률을 기록하며 ‘새로운 이명박 주’로 급부상했다.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정으로 뭉쳐 인지상정에 따라’ 움직인다 해도 세상은 이미 그 움직임을 ‘학맥에 따른 배타적 행동’으로 본다. 배타적 행동은 배타적 특권의 다른 이름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지 이 후보가 고려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고려대 출신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단순하고 무식한 짓”이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은 3%의 진실
▶대입 막판 초치기, 돌아버린 돈돈돈!
▶그렇게 싫다더니 광고는 다 따라하네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왜 ‘경제’에 표를 던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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