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된 이라크 파병 연장 논란, 네 번짼데도 새 논리 없이 정쟁만 흘러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또 시작됐다. 정부가 호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 연장 카드를 꺼내놓았다. 이번에는 아예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도와주십쇼’라고 외치며 약속을 어기고 있다.
올해로 네 번째 되풀이되는 이라크 파병 연장 논란의 중심에는 여전히 ‘한-미 동맹 강화’와 ‘국익 확보’라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올 초부터 외교통상부와 국방부를 통해 파병 연장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꾸준히 흘렸으면서도, 그동안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2003년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에 보냈을 때와 비교해 미국과의 관계가 끈끈해졌다는 어떠한 증거도, 해마다 1천억원 안팎의 주둔비용을 지불하면서 얻은 ‘국익’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알면서도 속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은 노-정 이중플레이 주장
올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라크 파병 연장 문제가 12월 대선을 코앞에 두고 불거졌다는 사실이다. 당장 대선 쟁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 일각에서는 벌써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여중생이 숨진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확산됐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파병 연장이 미국의 요구 사항인 점을 근거로 미국에 대한 태도가 대선 이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002년 반미 감정으로 대선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한나라당이 경계의 움직임을 늦추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 쪽 관계자는 “저쪽(정동영 후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와 전선을 형성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며 “2002년에 써먹었던 것처럼 분열과 편가르기를 통해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시키자는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정책위의장은 10월25일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자이툰 부대 파병 연장 문제에 대해 대통합민주신당 친노파 의원들이 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는 노 대통령과 정동영 후보가 각기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선을 위해 파병 연장 문제를 놓고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안에서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는 ‘음모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정부의 파병 연장 방침이 나오자마자 통합신당과 정동영 후보는 곧바로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이를 두고 이 후보 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 후보의 교감이 없을 수 없다”며 “노 대통령은 미국에 자신이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정 후보는 파병 연장 반대를 주도해서 개혁 진영 유권자들의 결집을 노리는 것으로 둘 다 ‘윈윈’하겠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불만과 상관없이, 이라크 파병 연장 문제를 놓고 ‘개혁 대 보수’의 구도는 이뤄졌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민중심당이 정부의 파병 연장 방침에 찬성의 뜻을 나타내면서 보수로 분류됐고, 통합신당과 민주노동당, 문국현 후보가 개혁 진영으로 자리매김했다.
통합신당과 정 후보 쪽에서는 이같은 결과에 대해 크게 나쁠 것 없다는 반응이다. 외연 확대에 앞서 우선 흩어진 개혁 진영 유권자들을 끌어모아야 하는 당면 과제를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철군 계획서’ 받고 통과됐던 연장안
사실 통합신당은 오히려 자이툰 부대의 파병 기간이 또다시 늘어지게 된다면 이에 대해 일정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다. 지난해 정부가 파병 연장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한 번만 더’를 요구했을 때, 열린우리당의 전반적인 기류는 ‘연장 불가’였다. 여론의 흐름도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쪽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파병 연장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임종석 의원이 제안한 ‘철군 계획서’ 제출이라는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파병을 한 해 더 연장해주되, 대신 올해 안으로 철군하겠다는 계획서 제출을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지난해 열린우리당의 이같은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정 후보와 통합신당이 정부의 파병 연장 방침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전략이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파병 문제에 대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쪽은 오히려 한나라당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손혁재 경기대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반사이익을 얻어왔던 한나라당이 파병 문제를 놓고 노 대통령과 같은 편에 서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며 “이렇게 되면 ‘노 대통령 때려서 정동영 주저앉힌다’는 한나라당의 선거전략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사이에 놓고 정동영 후보와 처지가 바뀌자, 이를 정 후보의 전략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분석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정 후보 쪽에서는 ‘대선 전략’이 아니냐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굳이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다.
정동영 후보 쪽 정청래 의원은 “당선을 위해 대선에 뛰어든 후보와 공당이라면 지지층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고 전략적으로 판단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며 “한나라당도 비판만 하지 말고 표 얻을 일을 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병 재연장 문제를 둘러싼 ‘보혁 구도’의 형성에 대해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이 온도차를 보이고 있지만, 파병 연장이나 ‘미국 변수’가 이번 대선에서 주요 전선으로 떠오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임위 통과까지는 문제 없을 듯
우선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벌써 세 번이나 연장에 재연장을 되풀이해온 파병 기간을 다시 한 번 늘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미 ‘이슈’로서의 신선함이 떨어졌다는 것이 이유다.
2002년 대선 직전 미군 장갑차 사고가 폭발력을 지녔던 것은 두 명의 여중생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이렇다 할 사과가 없었던 미군의 태도는 국민적 분노를 이끌어냈다. 반면 이라크에 주둔 중인 자이툰 부대에서는 아직 대형 사고는 없었다.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돼 있기는 하지만 국민들은 이를 쉽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이라크 파병 재연장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쉽게 달궈졌다 쉽게 꺼질 수 있는 사안”이라며 “파병 연장을 주도하는 쪽도 노무현 대통령이라 국민들이 뚜렷하게 ‘친미’와 ‘반미’로 나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국회 일정을 살펴봐도 이라크 파병 문제가 더 이상 확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와 국방부에서는 파병 연장 동의안을 11월 초에 국회에 상정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1차 관문은 국회 국방위원회다. 국방위원회는 11월13일과 15일에 잡혀 있다. 일단 상임위 통과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방위원 18명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의 8명은 물론이고 민주당 소속 2명은 전원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만 전원 찬성표를 던져도 의결 정족수는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여기에 통합신당 소속 8명의 국방위원 중에서도 열린우리당 시절 당내 보수파들의 모임 ‘안개모’를 이끌었던 유재건 의원과 이근식 의원, 그리고 국방부 장관 출신 조성태 의원은 파병에 대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이들이다. 정부의 연장 방침에도 유 의원과 조 의원은 이미 찬성한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선 후 임시국회로 넘어갈 것”
관건은 11월22∼23일에 열릴 국회 본회의다. 통합신당에서도 이탈표가 생길 우려는 있지만 사정은 한나라당 쪽도 마찬가지다. 파병 반대론자인 권오을 의원은 10월24일 과의 만남에서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소신이 있고, 그동안 이 소신이 바뀔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상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같은 당의 고진화, 배일도 의원도 역시 연장은 안 된다는 자세다.
이처럼 두 당 모두 표 단속에 신경을 써야 하는 형편이라면, 대선을 앞두고 정해진 국회 회기 내에 무리해서 처리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양당에서 모두 제기되고 있다. 국방위원회 소속 관계자는 “11월 말 국회에서 파병 연장안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지면 자연스럽게 대선이 끝난 직후 소집될 임시국회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탓에 이라크 파병 연장 문제가 이처럼 정쟁으로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작 파병 연장 자체에 대한 문제점과 찬반 논리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파병 연장의 목적이 청와대가 말하는 것처럼 한-미 동맹 강화에 있거나 국익 실현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한-미 동맹을 튼튼히 하고 경제적 실익을 얻어낼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치열한 공방은 한나라당 대 통합신당, 이명박 대 정동영의 구도로 진행 중이고, 정작 노 대통령은 한 발짝 물러서서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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