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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만 정신이 나갔나 싶더라

등록 2007-11-02 00:00 수정 2020-05-03 04:25

1981년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 마찰로 검찰 떠난 구상진 서울시립대 교수

▣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군사독재 시절 공안사건은 필요에 따라 쉽게도 만들어졌다. 기억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진 고문 끝에 혹은 간첩으로, 혹은 용공사범으로 둔갑했다. 1981년 7월 재판이 시작된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도 그런 공안사건 가운데 하나다. 당시 사건 처리 과정에서 안기부와의 마찰로 검찰을 떠나야 했던 구상진 서울시립대 교수(형사법)를 10월24일 오후 교내 연구실에서 만났다.

5공의 1호 공안검사로서…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란 뭔가?

=사건 기록을 보면 학생들이 유인물을 준비해 시위를 벌이기 위해 교내의 한 장소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돼 있다. 당시는 계엄 치하여서 학교 안에 군인이 진주해 있었다. 객관적으로 (학생들이) 실제 뜻을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가 된 것은 그게 공식적으로 ‘광주사태’ 이후 최초의 학생 시위 사건이란 점이다. 계엄사로선 놀랐을 게다.

명색이 ‘내란음모’ 사건인데.

=5·17 이후 첫 번째 시위이다 보니,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당연히 군부에 대해 도전적이었다.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그래도 되느냐’고 물으니, ‘자기도 맘대로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우리 맘대로다’고 하더라. 내란음모죄,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등이 적용돼 송치돼왔다.

기소 단계에서 왜 문제가 생겼나?

=당시 5공 정부가 출범하면서 서울지검 공안부도 새로 구성됐는데, 내가 편제상 5공의 1호 공안검사다. 전국 학원가를 맡게 됐고, 학원 사건 처리 지침을 만들라는 지시도 받았다. 연대생 사건은 첫 사건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을 내란음모로 처벌하면, 앞으로 비슷한 사건도 다 내란음모로 처벌해야 할 판이었다.

사안이 단순 집시법 위반이었다는 얘긴가?

=그건 내가 말하는 요지가 아니다. 당시 ‘안보수사조정권’이란 게 있었다. 안기부령이었는데, 공안검사들 방에 모두 비치돼 있었다. 핵심은 두 가지다. 피의자 신병에 대해선, 구속된 사람을 석방시키기 위해서도 저쪽(안기부)의 허락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자기들 송치 의견과 다른 의견으로 기소할 때도 동의를 받도록 돼 있다. 달리 말해 안기부의 수사는 검찰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내란죄 적용은 곤란하다고 판단했고, 안기부 쪽에 답변을 구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기소 만료 시점이 다가왔다.

왜 기소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냈나?

=사실과 다르다. 내 나름대로 정밀하게 기소장을 썼고, 사직서를 함께 올렸다. 국가 질서를 뒤엎을 만한 실체도 없었고, 체제 전복 단계로 나아간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 학생은 책 을 빌려준 것밖에 없었고, 시위 현장에 있었는지 여부도 불투명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가 수괴로 몰렸다. 그 학생에겐 무혐의 의견을 냈던 것 같다.

결국 검찰을 떠나게 됐는데.

=안기부가 조정권을 행사하지 않으니 선택은 두 가지다. 무시하고 석방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인데, 내란죄로 송치된 피의자를 검찰이 그냥 내보낼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선택은 알아서 굴복해야 하는 것인데, 5공 첫 학원 사건을 맡은 사람으로서 알아서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을 내란죄로 처벌하기 시작하면 결국 정권은 피로써 붕괴될 수밖에 없다.

결국 1심에서 내란죄 인정

조사 도중 위협은 없었나?

=“대통령에게 직보를 했다”고 압박을 해왔다. 조서에 학생들이 ‘공산혁명을 꿈꿨다’고 써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뭔지 보고하라’고 했더니, “성분이 나빠서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혁명을 꿈꿨다더라”고 하더라. 또 학생들이 읽었다는 외국어 책이 불온서적인지 판단하기 위해 “요지를 번역해오라”고 했더니 화를 내기도 했다. 협박 전화도 간간이 걸려오곤 했지만, 어떤 시기에도 그런 식의 압력은 있는 법이다.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왔나?

=1심에서 내란죄가 인정됐다고 하더라. 나름대로 고민해 결정한 것인데…. 법원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법적으로 당연한 일을 한다는 게 나 혼자 절벽을 들이받은 꼴이랄까? 나만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건 아닌가 싶더라. (웃음) 당시 내 판단이 틀렸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 지금도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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