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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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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학부모들도 “글쎄…”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특목고가 늘어도 ‘특특목고’ ‘특특특목고’로 서열화… 강남 학원은 프로그램 확대 채비</font>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10월10일 수요일 밤 11시30분, 경기 과천시의 한 아파트 단지 앞. 중2 승현(가명)이 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먹고 있다. 서울 강남 대치동에서 영어 ‘라이팅’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과천 애들 3명과 압구정 애 1명이 한 팀으로 일주일에 두 번 선생님 집에서 교습을 받는다고 한다.

상위권과 하위권, 절반으로 나뉠 것

승현이는 외고를 준비하고 있다. 올봄에는 석 달간 영어 리딩 수업을 받았다. 국어, 수학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영어만 세분화해서 특별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승현이는 특목고가 늘어나는 것이 “별로 안 좋다”고 말했다.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애들도 외고가 많이 생기면 다 외고에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승현이는 자율형 사립고 등 특성화고 300곳을 설립하겠다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공약을 “외고가 더 많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간, 서울 대치동 학원가는 불야성이다. 서울과 경기권 등의 외고 시험이 이번달과 다음달에 몰려 있어서 새벽 1시가 넘어야 학원 수업이 끝난다. 한 외고전문학원 앞에서 중3 아들을 기다리던 ㄱ씨는 아이를 경기도의 한 외고에 지원시킬 생각이라고 했다. 서울에 있는 외고에 갈 성적은 안 되고 기숙 학교라서 서울 거주자도 입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적이 안정권은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붙을 수도 있고, 딴 애들 다 공부하는데 혼자 놀리는 것도 그렇고, 떨어져도 영어 하나는 건지니까…. 어차피 교실은 엉망진창이거든요.”

ㄱ씨의 아들처럼 꼭 붙겠다는 게 아니라도, 강남 중3 교실 한 반 학생의 3분의 1은 과학고나 외고 등의 ‘전기 시험’에 매달려 있다. 봄에는 절반가량이었으나 그나마 ‘막바지’라 걸러진 게 이 정도이다. 내신 반영이 3학년 1학기까지이니 교사들도 상위 그룹 애들 위주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학교 숙제는커녕 중간고사도 대충 때워버리고 영어와 수학에 매달린다.

특목고 확대와 대입 자율화를 뼈대로 한 공약을 내놓으며 이명박 후보는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겠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고교를 만들어 선택의 폭을 넓히고 대학별로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주면, 획일적 입시 통제에서 비롯된 사교육의 폐단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약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강남 사람들을 위한 맞춤 공약’이라고 비판한다. 강남의 사교육이 교육의 ‘표준’이 된 시대에 설사 강남을 위한 공약이라도 이 후보로서는 ‘밑지는 장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강남 학부모들은 쌍수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찬반이 절반으로 나뉠걸요? 상위권이랑 하위권이랑. 저 같은 엄마들은 당연히 싫죠.”

중3인 큰아이가 특목고에 진학할 성적이 아니므로 고교 2학년이 될 즈음 강북으로 이사 가서 내신이라도 챙길 생각이라는 대치동 학부모 박아무개(42)씨는 이명박 후보의 공약이 “당연히 싫다”고 했다. 초등 6학년인 둘째의 성적도 상위권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목고에 못 가도 ‘강남의 한 고교’에 다니기만 하면 애들 공부를 다잡을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20%의 특목고에 끼지 못하는 순간 ‘루저’가 돼버릴까 걱정된다고 했다. 박씨가 강남 거주를 고집해온 이유는 “강남에서 꼴등 해도 전국 평균 이상”은 된다는 ‘강남 프리미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외고나 과학고의 간판을 걸지 않더라도 이 후보의 공약이 현실화된다면, 특성화 고교는 결국 ‘전기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다.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 강남과 송파 일대에서 오랫동안 수학전문 과외교사를 해온 ㅇ(43)씨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2~3%의 ‘입시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해 30~40%의 아이들이 뛰었다면 앞으로는 20%의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80~90%의 아이들이 뛰게 된다”고 말했다. 한 해에 150명을 뽑는 민족사관학교를 겨냥한 민사고반을 운영하는 전국의 학원 수가 민사고 정원을 능가하는 것을 감안하면 ㅇ씨의 말이 무리는 아니다.

대치동에서 초등학생 대상 과학고반을 운영하는 한 수학학원 상담교사는 “나도 학부모인데, 확실하게 사교육의 현실을 오픈해서 학교든 학생이든 실력대로 경쟁하는 게 좋다”며 이 후보의 공약을 찬성했다. “공교육, 공교육 하는데, 어차피 지금 학교만 벗어나면 학원별로 강의별로 레벨 테스트를 거쳐서 등급이 매겨진다. 학교 안에서만 평준화를 유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명문 고교를 더 만들면 똑똑한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이미 서울 강남의 입시 학원가는 새 프로그램 짜기에 분주하다. 경기 분당의 한 학원 원장은 “대입 과목이 축소되고 고교 입시가 강화되면 학원 커리큘럼과 학생 등급 기준도 달라진다”며 “이명박 후보 당선과 동시에 학원비 상한선이나 수업 시간 한도도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유치원생 때부터 창의력 수학을 시키는데, 그게 다 과학고를 겨냥한 게 아니냐”라며 “특성화 고교가 늘어나면 사교육 시장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사교육에 관한 한 ‘범강남권’인 서울 목동에 사는 주부 김영주(43)씨는 이 후보의 공약에 대해 “돈을 대체 얼마나 더 쏟아부어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차라리 외고고 뭐고 다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의 사업으로 중국에서 5년 동안 살다 두 아이만 데리고 지난여름 귀국했다. 중국 공립학교에서 1, 2등 하던 큰딸(중1)의 교육 때문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 석 달도 안 돼 후회가 된다고 한다. 아이를 외고준비반에 보내려면 최소 한 달에 150만원이 든다. 중3이 되면 더 늘어난다. 1년에 2천만원 정도 예상되는 미국 유학 비용을 웃도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최상위권 학생들만 갈 수 있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지만, 특목고가 늘어나면 지금처럼 가르쳐봤자 중간보다 좀 좋은 수준의 학교에 가는 준비를 하는 셈이다. 특목고 중에서도 좋은 학교에 보내려면 이 정도 투자만으로는 안 되지 않겠나. 대입이 자율화되면 등록금도 자율화되고 기부입학 빗장도 풀릴 게 뻔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이래저래 돈 많은 집 애들에게 밀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특목고가 늘어도 ‘특특목고’ ‘특특특목고’로 서열이 매겨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거기에 맞추려면 허리가 더 휜다는 얘기이다. 김씨는 “더 늦기 전에 큰아이와 초등 4학년인 둘째를 함께 외국에 보내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닐까 고민된다”고 했다.

외국에 보내는 게 ‘남는 장사’

이 후보는 10월11일 문화방송 에서 “대학 서열화가 변하지 않으면 (이 후보의 공약은) 대입 경쟁을 고입 경쟁, 중입 경쟁까지 끌어내리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자사고가 몇 개 안 된다. 그 학교 가면 좋은 대학 간다고 (다들) 가려 한다. 자율고를 100개 만들어 들어갈 기회가 확대되면 그것이 많이 준다. 교육이 다양성, 수월성을 갖춰야 경쟁력을 갖춘다”고 답변했다.

강남의 학부모들은 아이들 성적과 경제 사정에 따라 이 후보의 공약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고등학교가 늘어나면 교육 다양성과 수월성이 커질 것이라는 주장에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설상가상 대입 본고사도 사실상 부활되는데, 어느 고교에서 한가하게 ‘다양하고 수월한’ 교육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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