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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뒤, 극동연방은 러시아일까

등록 2006-11-23 00:00 수정 2020-05-03 04:24

드넓은 영토에 러시아인은 고작 700만명, 영토 맞댄 중국 동북3성에는 1억 인구…주방용품 등 소비재 거래 이어 농업 생산과 식량 공급까지 장악하며 죄어들어와

▣하바롭스크=베르틸 린트네르 전 기자

샹강반점의 음식은 탁월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손님들은 팝송 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샹강반점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고, 매일 밤이 만원사례였다. 홍콩을 한어병음으로 표기한 ‘샹강’은 건너편 중국 땅 헤이룽장성에선 물론 표준 로마자 표기법일 터이다. 샹강반점이 자리를 잡은 곳은 서구 어딘가가 아니라, 러시아 극동지역 하바롭스크다.

쉴 새 없이 국경 넘는 각종 원료

샹강반점은 또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넘어들어온 중국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중국 장사꾼들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고, 하바롭스크뿐 아니라 인근 블라고베셴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등지까지 정착지를 넓히고 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 인구는 계속해서 줄고 있다. 출생률도 낮은데다, 매년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유럽 쪽 러시아로 이주하고 있다. 극동지역에선 공장도 군사시설도 문을 닫고만 있기 때문이다.

현지 주민들과 정부 당국자들은 지금부터 100년 뒤면 이 일대가 더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경제적인 측면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은 유럽 쪽 러시아와는 분리돼 있는 상태다.

지난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극동지역은 오호츠크해에서 난 생선과 게 따위를 유럽 쪽 러시아 일대에 공급했다. 이 일대에 자리한 중공업 단지에선 강철과 항공기·선박을 생산했고, 시내 상점과 시장에선 외국 소비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이 일대 시장으론 중국산 소비재와 식료품이 물밀듯 밀려들어오고 있다. 유럽 쪽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것보다 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목재를 포함한 각종 원료는 헤이룽장성을 향해 쉴 새 없이 국경을 넘고 있다. 전체 중공업 단지가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고, 설비는 고철이 돼 중국으로 팔려가고 있다. 또 수산물은 대부분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인구적 변화도 눈에 띈다. 소비에트연방과 함께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중국 국경무역 업자와 시한부 이주노동자들이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지금도 국경을 넘나들고 있지만, 지난해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빌랴 겔브라스 모스크바대 교수가 지적한 대로 러시아에서 사는 쪽을 택했다. 겔브라스 교수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러시아에 영주할 마음으로 입국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불법 이민자로 분류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들 대부분은 부패한 지역 공무원들에게서 가짜 서류나 심지어 영주권까지 구해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공무원들은 당국에 고발할 가능성이 있는 동료 러시아인들보다는 중국인 등 외국인들에게서 뇌물을 받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러시아가 거대한 극동연방 지역을 장악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이후 개척민과 탐험가들도 이곳을 찾긴 했지만, 강력범과 정치범, 각종 파렴치범들의 유배지화했다. 그럼에도 이 일대는 극도로 인구밀도가 희박했다. 현재 극동지역 일대 621만5900㎢에 이르는 드넓은 면적엔 고작 70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는 1991년의 900만 인구에서 줄어든 것이다. 반면 국경 너머 중국의 동북3성(헤이룽장·지린·랴오닝성)에만 1억 인구가 살고 있다. 특히 이들 지역은 중국의 기준으로도 이상하리만치 높은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한 전문가는 “중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생긴 공백을 메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건설 분야를 독점한 ‘후아 푸’

이런 상황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단지 인구학적 균형만 바뀌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정치적 지향이 여전히 모국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 이민자들에게 러시아는 너무 가난하고 후진적인 탓에 러시아인이란 정체성에 동화되기 쉽지 않다.

현재 공식적으로 레나강 유역에서 베링해 인근까지 러시아 극동지역에 영구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약 4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실제 이 일대에 거주하는 중국인 규모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 사는 지역은 주요 3개 도시로, 특히 하바롭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데다 다양성마저 떨어지는 블라고베셴스크에서 가장 압도적이다.

아무르 강변에 자리한 블라고베셴스크에선 중국 헤이룽장성의 국경도시 헤이허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중국 무역업자들은 날랜 배에 각종 물품을 싣고 30분 단위로 부지런히 두 도시를 오간다. 일부 러시아 무역업자들도 눈에 띄긴 하지만, 중국에서 주방용품이나 장난감, 신발과 연장 등을 사들여오는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중국인들이 장악한 것은 소비재 무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블라고베셴스크의 건설 분야는 중국계 업체인 ‘후아 푸’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 업체는 최근 러시아 극동지역 최고층 건물을 착공했다. 러시아의 공식 휴일이 아님에도 중국의 음력설이 되면 이곳에선 화약놀이와 북춤, 사자춤 등 각종 중국 명절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이런 행사가 열릴 때면 ‘아무르스키 오블라스트’로 불리는 이 일대 자치정부의 시장과 주지사 등이 초청되곤 한다. 현지 러시아인들의 표현대로 아무르스키 오블라스트는 러시아 전 지역에서 ‘서서히 죄어 들어오는 중국인들의 침략’에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보인다. 이 일대는 일본 영토와 맞먹는 36만여㎢의 면적에 인구라곤 90만 명에 불과하다. 반면 아무르강 건너편 헤이룽장성엔 3500만이 넘는 인구가 몰려 있다.

현지 러시아인들은 자기들 땅이 농경에 부적합하고, 지독한 추위가 연중 이어지는 일기도 농사에 좋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농사에도 열심이다. 류드밀라 에로키나 블라디보스토크국립대 연구원은 “중국 사업가들은 지방 공무원들을 매수해 러시아 농부의 토지를 사들인 뒤 중국에서 인력을 데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며 “문제는 러시아에는 개인의 토지 소유와 관련된 법률이 전무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선 모든 토지를 국가가 소유하며, 개인 농민은 땅을 이용할 권리만 갖는다.

여기에 야채와 과일, 돼지고기와 심지어 계란까지 중국에서 들어오면서 러시아 극동지역의 식량안보가 위협받고 있다. 에로키나 연구원은 “중국인들은 이 지역에서 농업 생산과 식량 공급을 장악하고 있다”며 “이제 러시아인들은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독한 추위 무릅쓰고 농사에도 열심

러시아 극동지역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최소 4만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1년만 해도 이 일대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전무했다. 현지 러시아인들의 이주 행렬이 계속된다면, 중국계 이민자들은 텅 빈 시베리아까지 진출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시베리아마저 러시아에서 이탈해 중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중국계 이민자들의 확산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러시아로선 이를 막을 아무런 방도가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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