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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규는 왜 ‘일심회’ 를 쏘았나

등록 2006-11-10 00:00 수정 2020-05-02 04:24

보수언론과의 돌발 인터뷰가 그의 중도하차와 맞물린 건 우연일까…“죽느냐 사느냐 문제”인 고질적 원내 갈등이 사건 계기로 터져나와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한 편의 코미디 같다.”

지난 2년 동안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열린우리당 한 의원의 보좌관은 최근 “애국한다는 각오로 수사 중”이라는 국가정보원의 ‘북한 공작원 접촉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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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두 가지에서다. 섣부른 공개와 법 적용의 혼란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진행 중인 수사 내용을 외부에 알렸고, 단순한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죄인지 아니면 죄질이 무거운 간첩죄인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단언할 만큼 범죄 행위가 대단했나

그 중심엔 김승규 국정원장이 있다. 김 원장이 10월29일 와 한 인터뷰는 이번 수사의 문제점을 증폭시켰다. 김 원장은 “민주노동당은 이번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구속된 최기영(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은 장민호가 체포된 날 국정원 앞에서 시위를 했다. …간첩단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미 구속된 다섯 명은 지난 한 달 동안 집중적인 증거 확보 등 수사를 통해 (간첩 혐의가)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언론 인터뷰는 전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진행 중인 수사 상황을 특정 정당을 거론하며 관련자들의 혐의가 확정적인 것처럼 말했다. 그동안의 비공개 수사 원칙을 깬 것이다. 정보위원을 지낸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정보기관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검찰 출신으로 공안사건이나 특수수사를 해보지 않은 그가 이번 사건의 파장이 어떻게 어디로 튈지 ‘감’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김 원장의 말대로라면 국정원은 민주노동당의 전·현직 중앙당 간부가 연루된 간첩단(일심회) 사건을 밝혀낸 것이다. 아니라면, ‘얘기’는 크게 달라진다. 이 때문에 정보위 소속 열린우리당의 한 보좌관은 “국정원 내부도 무척 고민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간첩 의혹 사건이 엄청난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핵이라는 외부적 환경 탓도 있지만 연루자들을 ‘민주노동당’과 ‘386’이란 제목을 걸어 장사하려는 보수언론의 이해와 맞아떨어진 측면도 크다. 그런데 국정원장이 ‘단언’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 인사들에 대한 의혹은 용두사미로 그칠 공산도 있다. 최근 이상업 국정원 2차장으로부터 사건과 관련된 보고를 받은 유선호 의원(정보위 열린우리당 쪽 간사)은 “국정원이 현재의 혐의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 관련자가 2명 이외엔 더 없고, 범죄 혐의(간첩죄)도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이 뱉어낸 모든 말들은 아무런 전후 맥락 없이 불쑥 한 말들로 보긴 어렵다. 벌써 정치권의 논란으로 번진 ‘돌발 인터뷰’는 절묘하게도 그의 중도하차와 맞물려 있다. 보수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수사를 둘러싼 김 원장과 청와대 내 ‘386’과의 갈등설을 제기했다. 물론 이는 사실과 먼 추측이란 게 청와대와 국정원, 여권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한 발짝 더 나아가 국정원장의 교체가 수사를 ‘축소’하려는 정권 차원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치고 나갔다. 논쟁은 또 김 원장의 후임인 김만복 내정자(전 1차장)를 둘러싼 ‘적격성’ 시비로까지 번지고 있다. 그 와중에 곪을 대로 곪은 국정원 내 ‘지역갈등’도 삐져나오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모습들은 하나로 모아져 흔들리는 국정원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김승규 원장의 인터뷰로 돌아가보자. 그는 “(후임이 되려고) 일부 인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들이 되면 절대 안 된다.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권과) 코드를 맞출 우려가 있다. 내부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정원 내부를 감정적으로 들쑤셔놓은 것은 이 대목이다. ‘누구는 된다, 누구는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은 전임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은데다, 어쨌든 국정원의 오랜 숙원이던 내부 승진의 발목을 잡으려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바로 김 원장이 김만복 내정자와 이상업 2차장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

“유임 희망 세력이 언론 상대로 펌프질”

정보위원을 지낸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한때 국정원 내 1, 2차장은 회의도 안 들어간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원장과 차장의 갈등이 심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6월부터 원장 교체 얘기가 나온 뒤 김 원장은 두 사람이 자기 후임을 노리고 끊임없이 청와대 ‘386’ 민정라인 등을 통해 자신을 흔들어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에선 부총리급 예우를 받아오던 국정원장이 참여정부 하반기 들어 여러 장관 가운데 한 명으로 ‘격하’되면서 원장이 서운해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역으로 청와대와 여권에서는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10월 핵실험 징후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김 원장의 능력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원장과 차장들 사이의 갈등 성격이다. 국정원 안팎에선 이들의 불편한 관계가 단순히 후임을 둘러싼 갈등을 넘어서 원내 고질적인 지역갈등의 구도에서 잉태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전남 광양 출신인 김 원장이 전남 고흥 출신인 최준택 3차장에게만 눈길을 줬을 뿐 영남 출신인 1, 2차장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얘기는 국정원 안팎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정원을 두 개의 조직으로 쪼갠다면 영남과 호남으로 나뉠 만큼 인사 때 줄 서기가 극심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영남 대 호남의 지역 간 계파는 거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의 표현이 다소 과장됐을지 몰라도 근거는 충분하다.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은 지난해 10월에 낸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국정원의 정상 기관화에 대한 입장’이란 보고서에서 “전체 주요 간부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국민의 정부에서 영남 지역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21.4%였으나 참여정부 들어서 46.4%, 신설 부서장과 정무직인 기획조정실장을 포함하면 거의 50%에 육박한다”며 “정권마다 특정 지역이 득세하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은 고영구 전 원장 시절 내부 개혁의 일환으로 자리가 많이 준 데다 직급 정년제 실시 등으로 인사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는 악순환 구조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국정원 일부에서는 김 원장의 유임을 바라는 일부 호남 인사들이 언론에 수사기밀을 통째로 넘기는 등 해서는 안 될 일을 해 이번 간첩 의혹 사건이 증폭됐다는 의심까지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여권 인사는 “청와대는 김승규 원장의 유임을 강하게 희망하는 국정원 내 일부 세력들이 조·중·동을 상대로 계속 펌프질을 하는 등 ‘오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사건이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도 “김 원장이 자신의 ‘유임 운동’ 차원에서 실무진 의견을 무시하고 사건을 간첩단으로 몰았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는 ‘증거’가 없어 쉽게 예단할 수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이렇게 주장하는 당사자들의 편견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탕평책’이 김 원장의 교체를 정당화하는 쪽의 논리로, 반대로 유임을 위한 논리로 사용되는 것도 국정원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원장의 출신 성분에 따라 국정원이 특정 지역으로 쏠리는 문제에 공감하면서도 해법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는 국정원장의 경우 지역을 번갈아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내부의 지역적 싸움과 막강한 정보기관의 힘 때문에 지역적 균형을 맞추어야 하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비호남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국정원의 또 다른 관계자는 “지금 영남으로 가면 안 된다. 내부의 지역갈등을 해소한다고 하지만 되레 잠복한 갈등을 다시 부추길 것”이라고 전혀 다른 견해를 보였다. 국정원 기조실장을 역임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서동만 상지대 교수도 인터넷 매체인 과의 인터뷰에서 같은 이유를 들며, 영남 출신인 김만복 내정자의 임명이 부정적인 영향을 낳을 것으로 내다봤다.

수사권 폐지의 역풍 불 수도

이번 간첩 의혹 사건을 보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 논란이다. 국정원이 수사권을 버리고 정보기관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은 국가보안법 존폐 논란 이후 계속돼왔다. 이같은 요구는 수사 결과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쟁점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예민한 문제와 맞닿아 있는 탓에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처음에 사건을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죄 정도로 보고 증거가 더 필요하니까 좀더 깊이 있게 수사하자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의 대북 수사 파트가 나름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지만, 자칫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된 건수는 165건(2003년) → 114건(2004년) → 64건(2005년) → 37건(2006년 8월)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줄고 있는 추세다. 간첩 의혹 사건이 실체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 최재천 의원은 “정보기관과 수사기관 분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며 “국정원은 정보기관으로서 정작 해야 될 일인 북핵과 한-미 군사안보 동향 등이나 제대로 파악하라”고 꼬집었다.

새로운 국정원장 앞엔 국정원 내부의 갈등과 개혁, 국정원의 제자리 찾기 등 산적한 과제가 놓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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