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생활 속 일어를 일본에 와서 다시 보게 되었네…우리말만큼이나 무궁무진한 형용사와 부사들, 공부할 수록 산 넘어 산
▣ 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어릴 때 ‘홑청에 때 탄다’는 할머니의 꾸중을 들으면서도 우리 집 이불은 가끔 링이 되곤 했다. 로프가 없이도 온갖 시늉을 해가며 둘씩 편을 갈라 레슬링 ‘태그 매치’가 펼쳐졌다. 당연히 큰오빠가 ‘김일’ 선수 역을 맡았고, 나는 여건부, 셋째는 천규덕에, 키 크고 갸름한 둘째는 안토니오 이노키였다(이 선수들 이름 다 아는 분이라면, 필자의 나이도 대충 짐작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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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즐겨썼던 ‘도끼로 이마까’ ‘깐 데 또까’ ‘바께쓰로 피바다’류의 한글 경음을 이용한 초등학생 나름의 ‘유사’ 일본어는 표현의 섬뜩함에 비해 귀여운 말장난이었다. 시곗바늘 소리마저도 우리가 ‘똑딱’이면, 일본에선 ‘똑이노 딱, 똑이노 딱’이라고 키득대던 그때 말이다.
다꾸앙, 다마네기, 덴뿌라, 바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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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는 늘 우리 곁에 있었으니,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벤또 챙겨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김장 때면 조선무로 ‘다꾸앙’을 담그셨고, 어머니는 ‘다마네기’ 썰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왕십리 굴다리로 자식들을 집합시켜 ‘덴뿌라’를 사주셨다. 분식점엔 젓가락을 가를 때 기분마저 째지는 ‘와루바시’가 있었고, 학교에 가면 각 교실마다 ‘바께쓰’가 있었다.
벤또가 ‘편리함’을 뜻하고, 다꾸앙이 ‘쓰케모노’라고 하는 절임음식의 대표 격으로 실은 이를 처음 만드는 법을 고안해낸 스님의 이름이라는 사실, 우리가 서양의 파와 배추라는 뜻으로 쓰는 양파와 양배추가, 일본어로는 ‘구슬 모양의 파’라는 의미의 ‘다마네기’라는 건 일본에 와서 알았다. ‘와루바시’가 아니라 ‘와리바시’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젓가락이라는 걸 모르고 쓰는 사람이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다.
덴뿌라는 원래 ‘템포라’라는 포르투갈어에서 와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부터 도금한 물건 또는 가짜를 이를 때도, 일본에서는 ‘사꾸라’가 아닌 ‘덴뿌라’로 속칭한다는 것도 배웠다. 또 바께쓰는 ‘버킷’(bucket)의 일본어식 발음으로 함석으로 만든 양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꽤 웃었던 기억도 있다. 일본어 속의 외국어·외래어가 하도 많다 보니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어원과 본래의 뜻을 묻는 퀴즈가 넘쳐날 정도다.
일본식 경어 표현과 서로 다른 문화를 익반죽한 우스갯소리도 많다. “가캇테 고이”(덤벼!)라는 말을 몰라, “고치라니 도우조”(이쪽으로 오시죠)라고 하는 바람에 ‘이자카야’(술집)에서 한-일 간 한판 싸움을 벌이려다 웃고 말았다는 지난 월드컵 당시 ‘비화’는 유명하다. “스미마셍”(미안합니다)만큼이나 자주 쓰인다는 “소우데스네~”(아, 그렇군요)를 지나치게 열심히 연습한 어느 한국인의 실수담도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인 친구한테서 작별의 선물을 받을 때 “쓰마라나이 모노데스가…”(이거 참, 별거 아니지만…)라며 예의를 차린 일본 친구의 말에, “소우데스네~”(정말 그러네)라고 화답했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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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공부하고 통역 일을 할 정도였으니 일본어 공부는 쉽다면 쉬웠다. 어순과 조사를 이해하면 나머지는 아는 단어만큼 통했다. 그러나 그건 순간이다. 표현과 격의 다양함과 깊음을 알게 되면서 갈수록 어려워 죽을 맛이었으니, 한마디로 일본어는 배울수록 있는 사기를 갉아먹히고 마는 ‘산 넘어 산’이다. 같은 의미지만 격조를 달리할 수 있는 수많은 표현에 아연해하기도 하고, 굳이 일본어 의태어사전이나 각종 문학서적을 들추지 않더라도 형용사와 부사의 세계는 우리말만큼이나 다양하다. ‘사시미’ ‘스시’의 나라 일본에는 중국에도 없는 생선 이름 한자가 있다. 생선의 성질과 모양을 반영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일본식 한자들은 재미를 준다. 또 후지산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산 주변에 걸쳐 있는 구름 모양으로 다음날 날씨를 알 수 있다는데, 그 구름 이름만 수십 가지에 이른다.
후지산의 구름 이름만 수십 가지
한국에서 외국어고등학교와 외국어대학교를 다니면서도 괜한 반감에 피해다닌 일본어였다. 일본에 와서 ‘걸어다니는 고지엔(廣辭苑)’이라 불리는 한 일본 어르신께 배우면서 알게 된 ‘일본어의 세계’는 한글과의 같음과 다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언어를 포함한 문화는 편견과 절대성의 범주가 아닌 상대성이 녹아나는 세계, 문화의 절정이라는 것을 일본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마다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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