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자화자찬 환상몰이… 경제대국이자 미국 동맹국엔 부적합하다는 비판도…유엔분담금 체납액 갚고 유엔권고안에 맞게 정부개발원조금 늘리는 일부터 해야
▣ 방콕=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10월4일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기대한다’( 10월4일치),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은 또 하나의 독립선언?’( 10월2일치). 지난주 대한민국 신문 기사와 사설에 등장한 제목들이다. ‘충주 영어 신동’ ‘케네디 대통령 만난 뒤 외교관 꿈’ 같은 제목을 단 전기도 등장했다. ‘세속의 교황’ ‘지구촌 재상’같이 읽기 민망한 단어들도 곁들였다.
말 그대로,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놓고 난리가 났다.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외교관이 연예인을 제압한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국제사회가 한국을 인정’ ‘한국 외교 저력 과시’ ‘한국 브랜드 가치 상승’ ‘한국 외교 지평 확대’처럼 자화자찬 환상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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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은 다르지만 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유엔 개혁을 당부하던 문정인 교수의 칼럼은 느닷없이 아시아의 지분을 들먹이며 “유엔에서 아시아의 위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유엔 사무총장 직책에 어울리지도 않는 당파성을 주문했다. 과연, 그곳엔 보수도 진보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반기문 후보를 놓고 난리를 피우는 동안 아시아 시민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한국이 왜 그렇게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 연연하는가? 대체 무슨 일이 있나?” 아흐마드 타우픽(인도네시아 기자) 같은 이들은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지표상 세계 11위 경제대국에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도 언론인 사티야 시바라만은 “민주화를 주도한 한국 시민사회의 경험이라면 오히려 사무총장 자리보다는 유엔 개혁을 위해 야당 노릇을 하는 쪽에 서는 것이 국제사회 전체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가”라며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사무총장보다는 유엔의 야당 노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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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유엔 사무총장 자리는 지금까지 정치적·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녔거나, 그 영향력으로 국제사회를 교란 가능성을 지닌 나라 몫이 아니었다. 초기인 제1대 트뤼그베 할브단 리, 제2대 다그 함마르셸드에 이어 제4대 쿠르트 발트하임이 유럽에서 배출한 유엔사무총장이었지만, 그들은 비교적 중립적 성격이 강했던 노르웨이, 스웨덴, 오스트리아 출신들이었다. 그 말고는 제3대 우탄트가 버마, 제5대 하비에르 페레스 데케야르가 페루, 제6대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가 이집트 그리고 제7대 코피 아난이 가나 출신이었던 것처럼 모두 제3세계 쪽에서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다.
이런 전통을 놓고 본다면, 한국이 설 자리가 매우 모호하다는 뜻이다. 한국이 제3세계를 대표하지도 않는데다 중립적인 위치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후보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 건 한국 몫이 아니잖아? 뭐든 일등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 사람들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싱가포르 출신 언론인 유니스 라오( 프로듀서)는 한국 사람 속을 찔렀다. 타이 기자 프라윗 로자나프룩()도 뼈 있는 말을 꽂았다. “한국은 그런 것 말고도 잘하는 게 많은데 굳이 그런 자리까지 욕심내야 하나? 한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나 보네.” 이처럼 현장을 뛰는 아시아 네트워크 기자들 말을 종합해보면, 미국의 동맹국에다 일정한 경제력을 지닌 한국의 ‘차기 욕망’을 탐탁잖게 여기는 모양새다.
하지만 반기문 후보에게 기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난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외교 담당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반기문 후보 대세론은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싱가포르의 한 외교관은 “싱가포르 정부가 찬헹치 주미대사를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건 미국 정부 쪽에서 흘린 말일 뿐이다. 앞으로도 싱가포르 정부는 후보자를 낼 의향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이는 “싱가포르 정부는 ASEAN 대표인 수라끼앗이 사퇴하지 않는다면 공식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이미 반 장관 쪽으로 분위기가 돌아간 것 아니냐”라고 여운을 남겼다. 말레이시아 총리실 외교담당자는 “ASEAN 회원국으로서 ASEAN 대표를 지지하지만, 이미 수라끼앗은 너무 멀어진 게 사실이다. 누구든 가능성이 큰 아시아 출신 후보를 대안으로 밀 수밖에…”라며 간접적으로 ‘반기문 현실론’을 거론했다.
아시아도 ‘반기문 현실론’ 인정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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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쪽은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했던 다른 ASEAN 외교담당자들과 달리 실명을 밝혀도 좋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외무부 공보담당 책임자인 데스라 페르차야는 “인도네시아 정부는 반기문을 지지한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친밀한 관계뿐만 아니라 반기문이 아시아 전체 후보로서도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라끼앗은 더 이상 인도네시아의 선택이 아니다”고 밝혔다.
10월5일 오전, 그렇게 ASEAN 외무 당국자들과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두어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탁신 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냈던 수라끼앗 사티아라타이가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사퇴했다. 그는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리고 다음날, 타이 북부 치앙라이 골짜기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수라끼앗 대신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됐던 수린 핀수완 전 타이 외무장관은 “지금 상황은 매우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후보를 내기에는 시간이 없다. 유엔 안보리에서 (반기문 대신) 새로운 후보를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이젠 누가 되든 유엔 개혁을 위해 협력하는 일만 남았다”고 씁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후보를 낸 한국이 국제사회에 보낼 대답뿐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지금부터 국제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확고한 다짐과 그에 따른 실행이다. 이걸 너무 추상적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 유엔분담금 체납’ 같은 남세스런 일부터 좀 정리하면 된다. 세계 시민사회에서는 별것도 아닌 유엔 사무총장 자리 하나를 놓고 온 나라가 ‘단군 이래 최대 경사’니 어쩌니 떠들어대기 전에, 적어도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할 나라라면 유엔 회원국의 의무부터 충실히 수행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은 지난해 말 현재 유엔분담금 1억2970만달러를 체납한 상태다. 이건 2001년 720만달러에서 해마다 꼬박꼬박 두세 배로 늘어난 결과다. 달리 말하면 상습적이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유엔분담금 체납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덜렁 가입은 해놓고도, 그 모임의 룰(비록 강제성 없는 유엔 권고사항이라 하더라도)에 해당하는 ‘최소한 국민총소득(GNI)의 0.7%를 빈국에 지원하라’는 정부개발 원조(ODA)를 무시한 채, 2004년 기준 0.06%인 4억2200만달러를 내놓고 있다. 물론, 그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꼴찌다. 정부 당국자들이 2005년 7억4300만달러를 제공해 그 비율을 0.09%로 높였다고 자랑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미주개발은행(IDB) 출연액이 다자원조에 포함된 허수일 뿐이다. 한 수 접어주고 그걸 다 포함해도 0.1%에 못 미치고, 결과는 여전히 꼴찌다. 경제규모가 대한민국보다 작은 노르웨이가 국민총소득에서 0.93%를, 스웨덴이 0.92%를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0.87%를 정부개발 원조금으로 내놓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을 외치는 대한민국의 정부개발 원조금이 기껏 0.06%, 이거 너무하지 않은가?
국제사회 구성원의 책임을 다하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국제적인 합의를 무시하는 데 능숙할 뿐 아니라, 남을 돌보는 일에 인색하기까지 하다. 반상회 합의사항을 늘 무시하던 구두쇠 박 서방이 동장 하겠다고 나선 꼴과 뭐가 다르리오. 반기문 후보에게 전략적 이해니 냉전 종식 같은 추상적인 주문들을 마구 늘어놓는 일도, 유엔 사무총장 배출로 챙길 이문들을 따지는 일도 너무 이르지 않는가? 너무 얍삽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이래도 유엔 사무총장 자리 하나를 놓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잔치판을 벌여 국제사회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자, 먼 길을 떠나는 반기문 후보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유엔에 진 빚부터 갚고, 또 정부개발 원조금도 유엔 권고안에 맞춰보자. 이게 유엔 사무총장 배출을 염원하는 대한민국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게 대한민국을 돕는 일이다. 외환 보유고 세계 4위를 자랑만 할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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