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의 재량으로 실시하는 국기 경례, K리그 14개 프로축구단 중 9개에서 폐지… 국내 경기에서 시행하는 곳은 미국·한국뿐… 프로야구에선 삼성 라이온즈만 없애
▣ 수원=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 9월26일 저녁 6시25분. 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 대 두산 베어스의 경기가 열리는 수원 공설운동장. 경기 직전 초가을 야구장의 관중석은 한가로웠고 평화로웠다. 젊은 악단이 ‘쿵쿵쿵’ 북을 울려댔고,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은 양념통닭을 까먹었고, 열 살배기 아이들은 야구공을 던지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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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 운동회 같던 관중석의 소란을 한 번에 정리하는 안내방송이 울렸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과 관중들께서는 전광판 위의 국기를 향해 서주시길 바랍니다.”
2000년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최초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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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는 1분 동안 울렸고, 관중석은 정지화면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애국가가 끝나자,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던 관중들은 ‘와’ 소리를 질렀고, 다시 살아난 북 소리는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현대 선발 투수 전준호는 벗은 모자를 다시 쓰고 힘주어 1구를 뿌렸다.
운동 경기에 앞서 연주되는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경례. 석양녘 거리를 떠돌던 국기강하식 풍경이 경기장에선 여태껏 살아 있었다. 관중들의 반응을 살펴봤다. “막 경기장에 들어오던 참에 애국가가 울려서 가만히 서 있었어요. 어색하긴 하지만, 여기서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요? 평소에 애국가 부를 기회가 없잖아요.”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이성민(35)씨는 애국가와 함께 진행되는 국기 경례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다. 나머지 4명도 마찬가지였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며 “하든 하지 않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로축구 경기장에서는 이런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취재진이 K리그 프로축구단을 조사한 결과, 14개 구단 가운데 9개 구단이 경기 시작 전 애국가를 폐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해는 5개 구단이 폐지해 폐지 구단이 반수를 훌쩍 넘음으로써 이미 대세가 된 것처럼 보인다. 시발점은 2000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SK)였다. 1983년 프로축구 창립 이래 ‘최초로’ 애국가 폐지를 주도했던 이동만 제주 유나이티드 마케팅팀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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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각 구단 마케팅 담당자들이 모였을 때 애로점이 토로됐어요. 국가 행사도 아닌데 국민의례를 하고 애국가를 연주할 필요가 있느냐는 상식적인 문제 제기였지요. 애국가를 없애기로 결정한 데는 당시 서포터스 문화를 일군 부천 팬들의 힘도 컸습니다.”
K리그 운영협회인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경기 전 애국가 연주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 않다. 축구 경기는 홈 구단 주최 행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국가와 국기 경례 시행 여부는 전적으로 구단에 달려 있다. 올해 후기 리그부터 국민의례를 없앤 FC 서울의 이재호 대리는 지난해부터 해외 사례 조사와 진지한 검토를 거쳤다고 말했다. “아직도 폐지를 두고 반대하는 팬들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국가대항전이라면 몰라도 해외 리그에서 애국가를 트는 경우는 없습니다.”
KBO, 매년 초 애국가 영상물 제작·배포
유럽이나 남미, 일본의 국내 리그에서는 국가가 연주되지 않는다. 경기는 열기가 고조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경기 시작 전, 팀 응원가가 울리면 관중들의 함성이 높아지고 뒤를 이어 선수들이 입장한다. 선수들은 곧바로 서로 인사를 하고, 심판이 휘슬을 울려 경기는 시작된다. 서울 FC도 애국가를 없앤 대신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경건한 애국가는 경기 시작 전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한다. 축구 관계자들은 “애국가가 경기 전 준비운동으로 데운 선수들의 몸을 경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애국가가 선수들의 승부욕을 북돋우는 측면도 있지만, 그건 국가대항전의 경우일 뿐이다. 브라질 출신 세르지오 파리아스(39)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국내 리그에서는 (애국가가)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브라질에서는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국내 스포츠 경기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그럼 프로야구는 어떨까. 의 조사 결과, 8개 프로야구단 가운데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한 7개 구단은 여전히 애국가와 국기 경례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매년 애국가 영상물을 제작해 각 구단에 나눠준다.
“현대 유니콘스 박준수 투수는 마운드에 서서 애국가 연주를 기다린다고 해요. 시합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는 차원에서 애국가가 필요하다는 거죠. 반면에 젊은 팬들의 정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어요.”
정금조 KBO 운영팀장은 이를 두고 내부적인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KBO 차원에서 애국가 폐지를 결정한 바는 없다”면서도 “현재 분위기로는 ‘해야 한다’는 쪽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물론 프로야구에서도 축구와 마찬가지로 애국가 연주 여부는 원칙적으로 구단에 달렸다. 삼성 라이온즈는 나머지 구단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올해 들어 애국가 연주를 폐지했다. 대신 개막전과 어린이날 등 식전 행사가 있을 때만 초청 가수를 불러와 애국가를 연주한다.
현재 국내 경기에서조차 애국가와 국기 경례를 시행하는 곳은 한국과 미국뿐이다. 프로축구·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프로·아마추어 경기에서도 선수와 관중이 태극기 앞에 국기 경례를 하는 풍경이 연출된다. 반면 유럽의 국내 경기에서 국가를 부르면 ‘극우파’ 취급을 받는다.
구효송 영산대 생활스포츠학부 교수는 스포츠와 국가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결합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지적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가 고개를 푹 숙여 한국 민족주의를 담론화한 역사적 장면의 맞은편에는 독재정권이 이용한 스포츠 애국주의의 암울한 역사가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태권도가 ‘국기’가 되면서 도장에서 국기 경례가 확산되고, 나라를 빛내기 위해 소수 특기생에게 집중 지원을 하는 엘리트 체육 시스템이 한국인에게 자연스러운 과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도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에 따라 각각 1982년, 1983년에 출발했다. 구 교수는 “모든 구속과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발상으로 시작된 스포츠에 원칙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입돼선 안 된다”며 “국기 경례도 국가 행사가 아닌 곳에서 시행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유럽에서 국가 부르면 ‘극우파’
‘야구와 국기에 대한 경례가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상식적인 되물음을 한국인은 그동안 잊고 살아왔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 고로 나라가 있어야 스포츠도 있다’는 논리를 편다면, 국가는 신의 영역으로 승천하고 논쟁은 불가능해진다. 구 교수는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속박을 씌우고 있는 교육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인 황지우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패배감에 젖어 읊조렸던 영화관 애국가는 1989년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의 국가주의는 여전히 녹색 그라운드에 애국가를 울리고 선수와 관중을 ‘자연인’이 아닌 ‘국민’으로 호명하고 있다. 다행히 프로축구에서 국기 경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일상의 무감각으로 철옹성을 쌓아올린 국가주의가 천천히 해체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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