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의 ‘열정’ 대신 ‘피해 대중’에게 효능감을 주는 게 민노당이 살 길…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념과 정책을 뽑아내서 새로운 ‘눈높이 교과서’ 써야
▣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민주노동당은 위기이다. 5·31 지방선거로 그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정당의 존립에 직결돼 있는 세 가지 요건에서 전반적으로 부실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첫째, 충성도 높은 핵심 지지층 형성이 여전히 미약하다.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 70% 이상이 인물투표에서는 다른 당의 후보를 선택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둘째, 다수 보통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양대 정당(한나라당, 열린우리당) 주도의 의제 지형을 흔들 만한 고유한 의제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 가능성에서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다. 셋째, 당을 대표하면서 세상을 바꿔나갈 지도자감이라고 기대되는 인물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많은 보통 사람들의 인지 및 지지 정도에 바탕한 리더십이 아니라, 당내 정파들 간의 경합 혹은 담합 구도에 바탕한 ‘정파적 리더십’만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회운동단체’로 남을 것인가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지층 형성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지지층에게조차 하나의 독자적인 대안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을 대신할 선택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2005년 하반기 즈음에 실시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을 ‘또 하나의 사회운동단체’로 인식하고 있다. 자신들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 ‘유효 정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의 이러저러한 핵심 정책들에 대해 “누구에게나 다 좋을 정책이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설사 실현된다고 해도 먼 훗날의 일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결국 많은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에서 얻을 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핵심 지지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안정당으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효능감’을 선사해야 한다. 자신들의 이러저러한 이해관계와 관련해 ‘쓸모 있는 정당’이라고 체감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중심으로 그러해야 하는가?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 서민 등 ‘못 가진 자들’의 이해 요구를 우선한다고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사회적 부와 권력에서 배제됨으로써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피해 대중’들이다. 민주노동당은 이 피해 대중들의 고통과 울분을 해소해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의 주요 지지층은 고학력과 중상 수준 소득의 30대 화이트칼라층이다. 이들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실질적인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변혁운동에 대한 ‘회고적 동의’라는 차원에서 ‘진보라는 상징’을 지지한다. 다소 과장하자면 이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삶의 질 개선이라는 이해’가 아니라 ‘진보에 대한 열정’을 소비한다. 그것도 단지 정당투표에 한해서 그렇다. 열정은 그 자체로 오래가지 못한다. 열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정치’ 차원에서 얻어낸 피해 대중의 지지라는 토대를 구축해야만 한다.
당분간 재벌의 이기주의 제어에 집중해야
피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 혁신을 위한 전향적인 태도와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유력 정치인인 노회찬 의원은 5·31 지방선거 직후 당의 위기를 거론하면서 “정체성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 혁신을 통한 위기 극복에 대한 절절한 심경이 담겨져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민주노동당은 정체성의 차원에서조차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정체성에 대한 ‘자기 회의’ 없는 자기 혁신은 없다. 물론 피해 대중의 이해 대변 혹은 이해 충족을 제일 우선으로 하는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은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정체성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 즉 이념과 정책 만들기에서 민주노동당은 기존 좌파의 교과서만을 참조해서도, 또 그것을 우선적으로 참조해서도 안 된다. 즉, ‘교과서 좌파’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기존 좌파 교과서에서 찾아낸 이념과 정책을 피해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피해 대중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념과 정책을 도출해내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좌파 교과서를 써야만 한다. 피해 대중들의 실제 이해와 요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상대하는 피해 대중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의 피해 대중들이 아닌 한국의 피해 대중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철 지난 자주파(NL)-평등파(PD) 구도에 바탕한 정파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자기들끼리만 관심 있고 알아듣는 사안과 언어 사용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피해 대중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당분간’ 집중해야 할 문제는 의료 재벌, 부동산 재벌, 사교육 재벌 등 ‘거대 이익집단들의 이기주의’를 제어하고 그들의 사회적 책무 수행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조세의 공평성에 대해 “공평하지 않다”고 보는 ‘67%의 국민’을 배경으로, 그리고 “증세를 통해 사회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보는 ‘35%의 국민’을 중심으로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 대중들의 ‘행복추구권 보장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즉, 민주노동당은 ‘조세 개혁’을 중심으로 진보적 의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기업 노조의 적극적인 역할도 이끌어내야 한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최근 산별 전환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노동계에 대해 피해 대중들의 고통 해소를 위한 ‘사회연대임금’의 도입 등을 적극 권유해야 한다.
한국의 장 조레스, 그라쿠스를 기다린다
한편 이 모든 것은 진보정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총화돼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로 “대선 후보감이 있어서”를 들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제라는 정치제도적 환경은 물론이고 고대, 중세, 근현대 할 것 없이 세계 정치사는 훌륭한 인물에 의해 움직여왔다. ‘인민의 벗’으로 불리던 장 조레스가 한국에서, 민주노동당에서도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인물은 로마의 빈민층 등 가난한 무산자 계층을 위해 부유한 실업가층과 원로원 계층에 맞섰던 영원한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활약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간의 ‘집단지도 체제에 바탕한 당 중심성’의 신화에서 벗어나 영웅의 출현을 허하는 ‘간지’가 요구된다. 세상을 호령하는 명실상부한 진보정치의 지도자가 출현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주의’ 정치관이라는 혐의를 감수하면서도 말이다. 을 써 온갖 오해를 받았던 토머스 칼라일의 ‘대범함(?)’ 역시 진보정치가 취해야 할 자산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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