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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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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시대, 이번이 마지막인가

등록 2006-07-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깜짝 놀라게 하는 이변도 없고 유럽 챔피언스리그보다 경기력도 떨어지고…국가대항전 의미 퇴색하면서 선수들도 클럽에 더 많은 충성을 할애하는 양상

▣ 서형욱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

4년에 한 번씩, 6월은 온 세상을 들썩인다. 수십억의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작은 공 하나의 움직임. 20여 명의 선수가 90분 동안 그라운드 이쪽저쪽을 오가는 동안 전세계 200여 개 나라는 온전히 하나가 된다. 축구는, 아니 월드컵은 내셔널리즘의 전통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등에 업고 그렇게 세상을 지배한다.

비록 고작 한 달간일 뿐이지만 지구인 모두가 이 하나의 이벤트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국적’의 틀로 묶인 동아리의 수는 기껏해야 32개에 불과하니 남은 백수십 개의 국가에서는 딱히 관심 가질 리 없을 법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월드컵의 매력인 것을.

‘골맛’느끼는 횟수마저 확 줄어들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라는 축구, 그중에서도 이 종목을 가장 잘하는 선수들만을 가려 모은 월드컵은 모두가 꿈꾸는 최고의 기량이 그라운드 위에서 펼쳐진다는 기대 아래로 국적을 초월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최고 스타들의 몸놀림은 360도 각도에서 갖가지 장면을 잡아내는 수십 대의 카메라와 선수들의 동작 하나 표정 둘까지도 놓침 없이 유려하게 각색하는 수천, 수만 대의 노트북에 실려 한 번 둔 시선을 좀체 놓아주지 않는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역시 마찬가지다. 최종전에 오른 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단 두 팀이지만, 월드컵의 매력에 빠져든 세계인들은 쉽사리 관전을 포기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내 나라, 내 민족 사람이 아니라 한들 상관없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축구인’이라는 동류의식으로 묶여버린 뒤니까. 그렇게, 월드컵의 매력은 마력으로 바뀌어 대회의 규모를 확장시키고 국제축구연맹(FIFA)의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배경이 된다.

하지만 독일 월드컵 기간 내내 이번이 ‘월드컵 시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이유는 월드컵을 통해 얻는 축구의 매력이 예전보다 반감됐다는 점이다. 이제 월드컵은 예전처럼 4년간의 변화를 집대성해 보여주거나 유럽과 남미의 서로 다른 축구를 구경하는 축구 박람회로서의 의미도, 이변을 통한 드라마도, 최상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대회도 아니다. 매주 전세계의 갖가지 축구 경기가 전파를 타고 지구 곳곳에 퍼지는 시대이니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의 희소가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 월드컵’의 첫 번째 수혜자였던 펠레의 예를 보라. 그가 4년에 한 번 특출한 묘기를 선보일 때마다 지구 반대편의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는 월드컵 없이도 수많은 스타들이 뜨고 진다.

또한 예전처럼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거나 개막전에서 카메룬이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의 이변 발생 빈도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번 대회가 생생한 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팀도 없었고,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도 드물었다. 축구 강국들은 예상대로 조별 예선을 순조롭게 통과했고,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제3의 대륙은 기대보다 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8강 라인업은 유럽 6개 팀에 남미의 2강이 더해진 구도였으며 그나마 4강 이후부터는 유럽선수권대회와 판박이였다. 개최국 한국과 일본의 장마를 피하기 위해 개막 일정을 앞당기느라 스타급 선수들이 제대로 휴식 기간을 갖지 못해 강호들의 조기 탈락이 줄을 이었던 2002년은 일종의 ‘예외’였다는 분석을 입증하는 결과다.

그렇다면 경기 수준이 ‘지상 최대의 축구대회’라 할 만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유럽 챔피언스리그나 대륙별 국가대항전에 비하면 64경기의 품질은 균일하지 않다. 더욱이 이번 대회는 공격보다 수비가 중시되는 축구를 펼치는 팀이 많아 축구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러니 월드컵이 ‘세계 정상급 스타들의 향연’이라는 별칭을 유럽 챔피언스리그에 내주었다는 지적도 그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챔피언스리그에 비해 경기력이 더 떨어진다는 평가다. 게다가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축구의 꽃이라 할 ‘골’을 보는 횟수마저 예전보다 현격히 줄어들었다. 경기당 2.2골밖에 되지 않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40분 동안 1골씩 터지는 수준이다. 굳이 4년마다 이 대회를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긍정적인 답을 해주기 모호한 상황인 것이다.

국가대표 조기 은퇴하는 클럽 스타들

월드컵 위기설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국가대항전의 비중이 퇴색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90년대 이후 미디어는 월드컵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프로축구판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고 이에 따라 각국 축구협회가 주도하던 축구계의 권력이 점차 유수의 클럽들로부터 위협받기 시작했다. 클럽들은 월드컵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대항전이 자신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배를 불리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즉, 국가대항전과 클럽대항전의 갈등 국면이 형성된 것이다. 사실, 월드컵이나 대륙별 선수권대회의 경우 클럽의 이익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벤트였다. 엄청난 급여를 주고 선수들을 고용한 클럽들은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상당 기간 선수들을 국가대표팀에 내주어야 했고, 설사 선수들이 부상을 입은 채로 클럽에 복귀한다 해도 치료나 재활은 온전히 자신들이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클럽들이 더 억울한 것은 스케줄을 자신들의 뜻에 맞춰 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별도의 이벤트를 열어 수익 사업을 한다거나 선수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는 등의 자율적 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즉, 정규리그 이외의 시간은 FIFA에 저당 잡힌 것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선수들 역시 점점 국가대표팀보다는 클럽에 좀더 많은 충성을 할애했다. 사실 국가대표팀은 여전히 높은 국가대항전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각 선수들이 스타로 도약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빼면 선수들에게 그다지 이익이 없는 존재였다. 애국심으로 대표되는 ‘무형의’ 자부심 이외에 선수들에게 직접적인 보상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은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파벨 네드베트와 같은 스타들은 2004년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가 자국민들의 요청으로 은퇴 선언을 철회한 뒤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러나 아직 거뜬하게 선수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에 국가대표팀 은퇴를 공표하는 것은 사실 국가대항전에만 ‘보이콧’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대표팀이 아닌 클럽팀 경기에만 몰두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니까. 선수들의 이같은 인식 변화, 그리고 이를 유도하는 클럽축구의 발전 사이에서 국가대항전은 점차 위세를 잃어가고 있다. 각국 축구협회와 클럽팀 간의 주도권 다툼 역시 클럽의 위세가 커지면서 갈수록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국가대표팀 소집 도중 다친 선수가 이제는 클럽이 아닌 협회의 비용으로 부상 치료를 받게 된 것은 그중 한 신호다. FIFA나 유럽축구연맹(UEFA)이 자신들이 주관하는 대회를 늘이려 하는 동안(FIFA 클럽선수권대회의 창설과 UEFA 챔피언스리그 참가팀의 확대), 명문 클럽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창설하거나 FIFA의 잦은 대표팀 경기 소집에 불만을 표시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키워왔다.

‘FIFA 마피아’들의 돈불리기 이미지도 타격

이러한 흐름은 FIFA의 중앙집권적 축구계 시스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심각한 도전으로 발전될 소지가 있다. 물론, FIFA는 최근 자신들의 노선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그리스 축구협회에 대한 징계 차원으로 당분간 그리스 대표팀과 클럽팀들이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강경책을 쓰며 영역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 힘이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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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FIFA가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각종 마케팅 관련 현안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현금 긁어모으는 데 혈안이 된 인상을 준 것은 상당한 타격이다. 이쯤 되면, 월드컵이 축구 축제라기보다는 ‘FIFA 마피아’들의 배를 불려주기 위한 이벤트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올 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FIFA가 이렇다 할 변화 없이 4년을 보낸다면 훗날 2006년 독일 대회가 ‘월드컵 전성시대’의 마지막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가만, 그렇게 된다면 월드컵 16강에 온 국토가 들썩이는 우리네 풍경도 이번 대회를 고비로 점차 사그라들려나….


사랑해요, 이탈리아 수비수

서형욱 위원이 꼽은 2006 독일 월드컵 베스트11
이탈리아와 우크라이나의 16강전. 우크라이나가 문전에서 프리킥 찬스를 잡는 순간 한 남자의 벽력 같은 고함이 텔레비전 스피커를 울렸다. 이탈리아의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 현대 축구에서 골키퍼는 최종 수비수다. 그리고 때로는 수비라인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다. 부폰의 풍부한 성량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부폰을 포함해 무려 네 명의 이탈리아 수비수들을 이번 대회 베스트11에 꼽은 것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그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승리의 욕구가 그들 모두의 플레이에서 뿜어져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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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자책골 1골을 제외하면) 상대팀 선수들이 이탈리아의 골망을 흔들 기회를 단 한 번도 내주지 않고 결승 무대를 밟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이탈리아 수비수들에 대한 나의 편애는 정당하다 외친다.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한 센데로스는 16강에서 탈락할 때까지 단 1점도 실점하지 않은 스위스 수비의 핵이었다. 한국전에서 보여준 무지막지한 헤딩슛은 서플먼트.
미드필드에는 아르헨티나 공격의 해결사였던 로드리게스와 함께 프랑스 대표팀의 척추를 나눠 맡은 비에라와 지단을 꼽았다. 모두가 늙었다 조소할 때도 꿋꿋하게 경기에 전념하며 마침내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지단은 ‘유종의 미’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 슈퍼스타의 전형이다. 넓은 활동 범위와 결단력 있는 플레이로 지단과 마켈렐레 사이의 틈을 완벽하게 메운 비에라는 이번 대회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공격진에는 이번 대회 최다 득점자인 독일의 클로제와 역대 월드컵 최다골 기록을 갈아치운 브라질의 호나우두를 함께 올렸다. 발라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독일에 클로제가 없었다면 4강 진출도 꿈으로 끝났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로번은 오렌지가 아닌 ‘탱자’였던 이번 대회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빛난 존재다. 오토바이처럼 상대 측면을 파고들던 로번의 드리블은 독일 월드컵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박수를 이끌어낸 플레이가 아니었을까.




최고의 골, 베스트 3

이탈리아의 극적인 연장전 승리, 아르헨티나의 아름다운 곡선 등
1위: 이탈리아-독일 4강전 결승골(그로소)
모두가 승부차기를 예감하고 있던 순간, 연장전에만 골대를 두 번이나 맞힌 이탈리아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상대 아크 정면에서 슈팅 기회를 잡은 이탈리아의 미드필더 피를로는 지난 110여 분간 보여준 자신의 활약을 망치지 않으려는 듯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했고 결국 자신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던 오른쪽의 그로소에게 공을 흘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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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수라는 신분을 잠시 망각한 채 독일의 페널티 박스 안까지 침투한 그로소는 피를로가 건네준 공을 지체 없이 슈팅으로 연결, 레만 골키퍼의 손끝과 골대 사이로 미끈하게 밀어넣었다. 극적인 승부에 걸맞은 최고의 골.
2위: 아르헨티나-멕시코 16강전 결승골(로드리게스)
멕시코의 끈끈한 수비를 뚫지 못하고 연장에 돌입한 아르헨티나. 그러나 그들에겐 로드리게스가 있었다. 아름답게 곡선을 그려 먼 거리를 날아온 공을 거침없이 걷어차 상대 골문에 밀어넣은 로드리게스의 골은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결정타이기도 했다.
3위: 한국-스위스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결승골(센데로스)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번째 골 판정은 논외로 하자. 이에 앞서 터져나온 선제골은 야킨의 깔끔한 프리킥에서 시작된 센데로스의 명료한 헤딩슛이다. 굳이 특별할 것 없는 이 골 장면을 세 번째로 꼽은 이유는 그 뒤에 시작된다. 헤딩슛 직후 한국의 최진철과 정면으로 부딪힌 센데로스는 콧대가 부러져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골을 확인하자마자 잠시의 지체도 없이 터벅터벅 벤치를 향하며 당당한 세리머니를 펼쳤다. 고통을 호소하는 최진철의 실루엣 위로 피투성이가 된 센데로스의 구겨진 인상이 겹쳐지는 순간 스위스의 16강 진출을 직감했던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골에 대한 집념, 승리를 향한 신념을 보여준 인상적인 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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