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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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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의 악당, 알 자르카위

등록 2006-06-15 00:00 수정 2020-05-03 04:24

요르단의 ‘비행청소년’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로 재탄생… 이라크 잔혹극의 배후로 지목돼왔지만 미국의 과장이라는 지적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난 6월8일 이라크 중북부 바쿠바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요르단 출신 테러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그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극히 제한적인데다, 그나마도 미국과 요르단 정보기관이 내놓은 것이거나 주변 인물들의 파편적인 증언을 종합한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를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테러범이기는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폭력적인 범죄자’라고 잘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알카에다와 후세인 연계설의 증거?

그동안 알려진 바를 종합하면, 그는 1966년 10월20일 요르단 북서부 산업도시 자르카에서 ‘아흐메드 파델 나잘 알 칼라이레’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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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란 이름은 아랍어로 ‘자르카 출신인 무사브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베두인족 계열의 베니하산 부족 출신으로 알려진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다만 17살 무렵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뒤 한때 폭력을 일삼았으며, 이슬람에서 금지하는 폭음과 문신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르단 경찰당국은 자르카위가 1980년대 초반 성폭행 혐의로 잠시 감옥 신세를 졌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자르카위의 인생은 1989년 봄 옛 소련의 침공에 맞서 싸우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을 향하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는 2004년 7월 그의 삶을 추적한 특집기사에서 “그가 아프간에 도착할 무렵 소련군은 이미 철수를 시작했고, 할 일이 없어진 그는 현지의 한 이슬람 잡지에 기자로 취직해 아프간 전역을 돌며 대소 항전에 참여한 투사들을 만나고 다녔다”며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다”고 전한 바 있다.

아프간 생활을 접고 1992년 요르단으로 돌아온 자르카위는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담했다가, 이듬해 내란 및 불법 무기 소지죄 등으로 당국에 적발돼 기나긴 수감생활에 들어간다. 그는 수감기간 동안 코란의 6236개 구절을 암송하는 등 엄격한 자기단련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 3월 새 국왕 즉위 기념 특별 사면령에 따라 풀려난 자르카위는 잠시 요르단에 머물며 미국·이스라엘의 관광객을 겨냥한 테러 공격을 모의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는 아프간 국경지대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거쳐 아프간으로 잠입했으며, 미 정보당국은 당시 그가 아프간 서부 이란 국경지대에 훈련캠프를 차려놓고 독가스와 폭발물 제조 및 활용법 등을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9·11 동시테러에 대한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된 2001년 가을, 자르카위는 미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뒤 이라크로 몸을 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보당국은 이때 입은 부상으로 그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003년 2월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유엔 연설에서 “자르카위가 오사마 빈 라덴의 수하이며, 그가 이라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 정권이 연루됐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 정보당국도 “자르카위가 이라크로 간 것은 알카에다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쿠르드계 무장세력 안사르 알 이슬람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정보전문가들은 “자르카위가 별도의 무장세력을 이끌고 있으며, 빈 라덴과는 경쟁관계”라고 지적했다.

한편 그의 행방이 묘연해진 상황에서 2002년 10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미국 외교관 로렌스 폴리가 괴한의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직후 요르단 당국은 사건의 배후에 자르카위가 있다고 주장하며, 결석재판을 통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지난 2003년 8월 바그다드 주재 요르단대사관이 차량폭탄 공격의 배후로 자르카위가 꼽힌 것도 이런 정황 때문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 당국은 2003년 여름 이라크 중부 나자프에서 시아파 지도자 아야톨라 알 하킴이 암살된 직후 수니파인 자르카위를 그 배후로 지목했다. 이어 2004년 2월 미국은 자르카위가 알카에다 지도부에게 직접 보낸 것이라며 장문의 편지를 공개했다. 당시 공개된 편지를 보면, 글쓴이는 “이라크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종족갈등을 부추길 것”이라고 적었다. ‘내전’ 수준으로 치닫기 시작한 이라크의 유혈사태는 자르카위 같은 외부세력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란 ‘정황증거’였다. 나중에 이 편지가 조작된 것이라는 논란이 일긴 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빈 라덴과 비견되는 ‘거물’로 성장해갔다.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도 어느새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에게 내걸렸던 것과 같은 액수인 2500만달러로 높아졌다.

제거 작전으로 애꿎은 주민만 희생

이라크 주권이양을 전후로 잇따라 터진 외국인 납치·살해와 차량폭탄 공격 등 각종 잔혹극이 벌어질 때마다 그가 이끄는 ‘유일신과 성전’(타우히드 왈 지하드)은 어김없이 배후로 지목됐다. 나중에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로 이름을 바꾼 이 조직은 미국인 닉 버그와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를 납치·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은 자르카위의 은신처를 파괴한다면서 팔루자 등 저항이 거센 지역을 여러 차례 공습했지만, 애꿎은 주민들만 되풀이해 희생됐을 뿐 그의 자취를 찾지는 못했다. 이번에 그의 은신처를 찾아내 공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자르카위 조직 내부 제보자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은 미군 당국도 인정하는 바다.

자르카위의 사망 소식은 끝 모르고 치솟던 국제 유가마저 떨어뜨릴 정도의 ‘호재’로 작용했다. 하디사 학살 사건이 드러나면서 커져만 가던 미군에 대한 비난과 분노의 행렬도 잠시 주춤해졌다. 하지만 그가 사라졌다고 이라크에서 ‘저항’이 사그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일부에선 그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전후 혼란의 책임을 덮어씌울 악한이 필요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의 필요에 따라 과장된 인물”이라며 “그는 정치인들이 믿고 싶어하는 ‘그런 능력’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부풀려진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 이라크 상황이 어떻게 전개돼가는지를 지켜보면 이에 대한 ‘해답’은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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