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에 1승, 프랑스에 1패, 그리고 마지막 스위스와의 90분… 그 숨막히는 순간을 미리 재현해본 조별 예선 가상 시나리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경기 시작을 알리는 주심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에 깊은 정적에 짓눌려 있던 그라운드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넘쳐나는 아드레날린에 선수들의 심장은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다시 한 번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4천만은 텔레비전 화면 앞에 모여 ‘대~한민국’을 열창하고, 6월24일 한국과 스위스의 마지막 혈전이 벌어지는 하노버 AWD 아레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안정환과 박지성의 선축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 스위스와의 경기가 막을 열었다. 상대 공격수 프라이와 기각스가 안정환의 공을 뺏기 위해 맹렬한 속도로 압박을 시작한다.
패색이 짙어가던 77분께 일어난 기적
무게 441g의 팀가이스트(FIFA 공인구)는 선수들의 작은 몸동작 하나에 미세한 변화를 일으킨다. 우연과 필연이 겹친 그 가죽공의 움직임에 따라 90분 뒤면 한국과 스위스의 운명은 천당과 지옥으로 엇갈리게 될 것이다.
22명의 사내들이 내뿜는 열기에 그라운드 안의 공기는 절박한 긴장감으로 목이 멘다. ‘어느 쪽이 몇 대 몇으로 이길 것 같다’는 예측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두 차례의 혈전 끝에 한국은 승점 3점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한국과 스위스에 연패한 토고는 16강 탈락이 확정됐고, 스위스와 비긴 뒤 한국을 이긴 프랑스는 16강의 8부 능선에 올라서 있다. 한국은 스위스를 반드시 잡아야 하고, 스위스는 한국과 비기기만 해도 된다. 프라이의 도전을 받은 안정환이 박지성에게 공을 돌렸고, 박지성은 왼쪽 윙백 이영표에게 공을 연결했다.
6월13일 밤 10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벌어진 토고와의 첫 경기에서 ‘작은 장군’ 딕 아드보카트가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국내외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2-1의 신승을 거뒀다.
첫 골은 토고 쪽에서 터져나왔다. 37분 토고의 오른쪽 윙백 투레 아시미우가 올린 크로스를 ‘검은 표범’ 아데바요르가 최진철과의 몸싸움에서 승리하며 오른발로 받아넣어 한국팀의 골망을 흔들었다. 절망에 빠진 대표팀은 이천수와 설기현을 양쪽 날개 공격수로 내세워 기회를 엿보지만, 다르 니봄베와 마사메소 창가이 두 센터백의 육탄 공격에 막혀 번번이 무위에 그친다.
패색이 짙어가던 77분께 기적이 일어났다. 김남일의 전진 패스를 받아 벌칙 구역 안쪽으로 파고들던 박지성이 상대 지역 아크서클 3m 앞에서 니봄베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천천히 공에 다가선 이천수는 “내 오른발은 베컴”이라는 호언이 엉터리가 아님을 증명해낸다. 그의 발을 떠난 공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토고 선수들의 키를 넘어 골문 안쪽으로 빨려들었다.
동점골로 경기의 주도권은 한국 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84분. 안정환과 교체된 뒤 두세 번의 결정적 기회를 놓쳐버린 미완의 젊은 스트라이커 조재진은 왼쪽 코너에서 올라온 이을용의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끝내 토고의 골망을 흔들고 만다. 토고 골키퍼 아가사가 절망 속에 몸을 날려보지만, 프랑크푸르트 코메르츠방크 아레나와 서울시청 앞은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과 함께 붉은 물결의 천지로 변한 뒤다.
도박사들은 스위스의 승리에 걸었지만
애초부터 한국팀의 16강 진출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모든 판단에서 유럽을 우위에 두는 서구 언론들은 프랑스의 파트너로 한국이 아닌 스위스를 선택했다. 냉혹한 도박사들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영국의 유명 스포츠 베팅 회사인 윌리엄 힐사가 공개한 그룹별 16강 진출국을 놓고 전망한 배당률을 보면, G조에서는 프랑스가 1.4배로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스위스 4.33배, 한국 8.5배, 토고 17배 순이었다. 스위스가 16강에 진출할 가능성이 한국보다 2배나 높게 나온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월 들어 치른 두 차례 모의고사의 부진은 ‘태극전사’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대표팀은 노르웨이전에서는 긴 패스를 구사하는 유럽팀과의 몸싸움에 밀려 경기 주도권을 내준 채 가까스로 0-0으로 비겼고, 가나전에서는 개인 기량의 부족과 후반 체력 저하로 1-3으로 참패했다. 지난 3월1일 앙골라와의 평가전 직후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3월6일 조사 결과 우리나라가 16강 이상에 진출한다는 응답은 무려 93.1%에 달했지만, 가나전 이후 인터넷 포털 네이버가 6월5일부터 온라인 여론조사를 한 결과, 6일 현재 전체 응답자 3만4천여 명 중 7천여 명(20%)만이 16강 진출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가까스로 1승을 거둔 태극전사들은 6월19일 라이프치히에서 ‘레블뢰’ 군단과 맞붙었다. 레블뢰의 미드필더들은 강한 압박으로 태극전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한다. 미드필더들의 ‘타깃맨’(전방에서 패스를 받아주는 선수)이 돼야 하는 중앙 공격수 안정환·조재진은 비에라와 마켈렐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넘어지고, 너무 쉽게 공을 뺏겼는데 그때마다 경기장을 꽉 채운 프랑스 응원단 쪽에서는 환호성이 일었다. 패스할 곳을 찾지 못한 미드필더들은 의미 없는 롱패스를 남발했다. 계통이 무너진 한국의 미드필더들은 지단과 말루다가 중원을 휘저으며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손쉬운 슛 찬스를 만들어주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최진철과 김진규는 앙리의 속도 앞에서 속수무택이었다. 한국은 전반에만 프랑스에 두 골을 헌납했다.
전반이 끝난 뒤 아드보카트는 안정환과 조재진에게 대안이 없음을 가르쳤다. “너희는 상대 수비수의 거친 도전을 뚫고, 패스를 받아 전방으로 침투하는 이천수·박주영·박지성에게 연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거든 상대 수비를 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게 스트라이커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앙리의 빠른 발에 무너진 4백을 3백으로 전환하고, 트레제게와 앙리를 맨투맨으로 방어할 것을 지시했다.
후반은 한국의 페이스였다. 노쇠한 지단은 순간순간 변함없는 클래스로 우리 수비진을 유린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레블뢰 군단의 ‘계륵’으로 변해갔다. 지친 최진철을 대신해 나온 김영철과 김진규는 1986년 선배들이 마라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다양한 태권도 공격을 선보였다. 한국 선수들이 거친 태클로 무더기 노란 카드를 받은 대가로, 레블뢰의 두 창은 전반 같은 맹위를 떨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수비진은 쉽사리 한국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비달과 사뇰과 맞선 이영표와 송종국의 크로스는 날카롭지 못했다. 박지성의 재기 있는 드리블은 비에라·갈라스·튀랑의 삼각편대에 막혀 자주 고립됐다. 후반 들어 투입된 ‘포스트 지단’ 리베리의 돌파력은 가공할 만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팀은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골 없이 후반을 마쳤다.
설기현은 패스를 받아낼 수 있을까
스위스는 어느 팀을 만나도 쉽게 패배하지 않는 끈끈한 팀 정신으로 한국을 맞았다. 스위스의 쾨비 쿤 감독은 “반드시 한국을 이겨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월드컵에 앞선 평가전에서 아프리카의 강호 코트디부아르와 1-1로 비겼고, 아주리 군단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열함으로 1-1의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스위스의 왼쪽 빈틈을 노리고 설기현이 재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이영표의 긴 패스가 설기현을 향해 배달됐다. 스위스의 수비수 필리페 센데로스와 필리프 데겐은 설기현을 고립시키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과연 설기현은 패스를 받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태극전사’들은 16강에 진출할 수 있을까. 선수들과 관중의 몸속에는 아드레날린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한다.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심장이 울렁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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