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긋난 사랑과 피해의식의 파탄

등록 2006-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고위 공무원 부인과의 불륜으로 인생 꼬였던 지아무개씨의 드라마틱 인생… 지출내역 등 의문은 싱겁게 풀렸지만 여전히 38인 수사단에 포위돼 조사중

▣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5월20일 ‘박근혜 피습사건’은 2006년 한국 정치의 우연하고도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바닥을 기던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아예 곤두박질을 쳤고, 대표가 습격당한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예상치 못한 상승곡선을 탔다.

박근혜 습격, 지방선거의 분수령으로

역사를 움직인 한 명, 과연 그는 누구인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유세장에서 문구용 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얼굴을 그은 지아무개(50)씨. 그는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을까? 그의 뒤에는 정치 테러를 사주한 배후가 있는가? 그는 자신의 행위가 5·31 지방선거의 분수령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범행 동기를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수십 명의 기자들이 이씨의 고향인 인천 학익동 성매매 밀집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지씨의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씨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친구들은 그의 친부모가 갓난아기인 지씨를 1956년 인천 학익동의 한 주택 앞에 버렸고, 지씨 부부가 포대기에 싸인 그를 거두어 길렀다고 말했다.

25살이 된 1981년, 그는 처음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방화미수죄였다. 그는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정확한 기록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은 지씨가 돈 문제 등으로 부모와 다툰 뒤 집에 불을 지르려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은 1982년 가을이었다. 26살이던 지씨는 카바레에서 ‘첫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상대는 공무원 남편을 둔 유부녀였다. 여인은 지씨를 잠시 불장난의 대상으로 삼았겠지만, 지씨에게는 불같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불륜이 늘 그렇듯 곧 여인의 남편에게 들통났고, 여인은 지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꺼리는 첫사랑을 지씨는 때리고, 면도칼로 얼굴을 긋고, 돈을 뜯어내며 쫓아다녔다. 결국 지씨는 1985년 ‘첫사랑’한테 고소당했다. 4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1989년 풀려났다. 하지만 지씨의 나쁜 버릇은 계속됐다. 다시 첫사랑의 남편 직장으로 협박전화를 걸고, 협박전화에 시달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쫓아가 돈을 뜯어냈다. 나중에 그에게 징역 7년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한 법원 판결문은 이렇게 적었다. “실형을 복역한 데 대해 복수할 마음을 품었다”고.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사랑한 여인을 못 잊어 찾아갔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두들겨팼지만 고소를 안당했네

주변 인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긴 수감생활은 지씨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망가뜨렸던 것 같다. 여전히 사랑 때문에 저지른 일이라고 믿는 지씨는 죄를 반성하기보다는 온갖 피해의식을 마음속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변호를 맡은 한 공익법무관은 “보호감호 제도가 폐지되면서 다른 수감자들이 속속 나가는데 자신만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억울해했다”며 “억울함을 알리겠다며 폭행사건을 자꾸 일으켰고, 사회보호법을 만든 전두환 정권의 후신인 한나라당에 대한 적의를 담은 진술을 하고 탄원서를 내곤 했다”고 말했다. 이 법무관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면서 스스로를 ‘민주투사’로 생각하는 등 영웅심리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4년4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된 ‘민주투사’는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를 외치던 한나라당 국회의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박근혜 대표에게 흉기를 휘두른 그 자리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테러 기도’는 실패했다. “한나라당 의원을 패면 내 문제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치료해줄 계기를 마련해줄 걸로 알았는데 고소도 안 했다”고 지씨는 지인들에게 털어놨다.

박 대표에 대한 공격은 첫 번째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이었을까. 지씨를 가장 잘 아는 오랜 친구들은 그의 과거사와 출소 뒤 그가 한 말을 바탕으로 범행 동기를 쉽게 유추해냈다. 그러나 피해자 쪽(나중에는 최대의 수혜자가 됐지만)인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은 집요하게 배후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쏟아냈다. 어떻게 한 달 17만원의 최저생계지원금을 받는 사람이 감히 최신형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여섯 달 동안 700만원이 넘게 신용카드를 긁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범행 직전 1시간30분 동안 혼자서 하드를 6개나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값비싼 양복에 명품 구두라니?

배후를 철저히 밝히라는 한나라당과 언론의 압박에 검사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다. 하지만 이런 의혹들은 수사가 시작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풀렸다. 지씨는 룸살롱 바지사장 노릇을 해주는 대가로 500만원을 받았고, 천부적인 소질로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한테 빌붙어 200만원이 넘는 용돈을 뜯어냈다. 이 돈은 그의 헤픈 씀씀이를 감당하고도 남았다. 당뇨병 때문에 늘 단것이 당기는 그에게 하드 6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양복은 16만원짜리였고, 구두는 8만원짜리였다.

DMB폰과 하드 6개의 비밀?

38명으로 구성된 수사본부가 지씨의 금전출납부를 꼼꼼히 작성하고,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일일이 확인하고, 출소 뒤 그가 만난 모든 인물들의 방명록을 쓰고 있지만 아직까지 배후인물의 단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앉을 자리도 부족했던 수사본부 기자실은 하나둘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지만, 박정희 정권 때나 있었던 야당 대표 피습사건에 합동수사본부는 오늘도 밤늦도록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아마도 지씨의 기억보다 꼼꼼한 일기장을 완성할 때까지 수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토록 한 사람의 일생이 언론과 정당과 국가기관에 의해 집중 분석된 적이 있었을까. 여하튼 그는 2006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하나의 계층과 하나의 군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그가 왜 야당 대표를 피습했는지 명확히 드러난 건 하나도 없지만.



배후는 유흥업체?

기존 정치테러와 달리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범죄 불러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표가 입원한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한 뒤, “정치테러는 배후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아무개씨의 배후세력은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라 없는 것 같다. 현재까지 수사 결과를 볼 때,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조직적인 정치테러’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과 상반된 방향의 결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지씨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야당 정치인에게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지씨의 통장에 찍힌 ‘거액 입금’도 유흥업체의 바지사장을 해준 대가로 드러나 테러자금 전달이 아닌 생계형 범죄로 밝혀졌다.
김 전 대통령의 말대로 여태 정치테러의 배후가 밝혀진 적은 없다. 1969년 김 전 대통령이 당한 초산 테러, 1973년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구와 여운형, 장준하의 죽음도 모두 정치테러로 추정됐으나, 배후와 조직은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자 쪽은 사건의 배후를 ‘사회불만 세력’이 아니라 당시 기득권층이나 공안기관을 지목해왔다.
그러나 지씨의 박 대표 피습은 과거 정치테러와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지씨가 평소 보호감호제도에 심한 반감을 드러낸 점, 사회보호법을 만든 전두환 정권의 후신인 한나라당에 탄원서를 낸 점 등을 보면, 국가기관이나 정치집단의 고도의 정치적 목적에서라기보다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불러온 ‘아래에서 위를 향한’ 고의적 범죄일 경우가 많다. 이웅혁 경찰대 교수(범죄학)는 “정치테러는 가해자의 이념에 따라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진다”며 “지씨가 직접 밝힌 범행 이유를 들을 수 없어 현재로선 규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