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총을 겨누고 분파투쟁 속에 중국을 피로 물들인 홍위병들 … 방치된 채 찾는 이조차 없는 그들의 무덤, 충칭 문혁묘군을 찾다
▣ 충칭=모종혁 한겨레 통신원 jhmo@yahoo.com
우거진 수풀 속에 찾는 이 없는 묘비들만이 고즈넉이 우뚝 서 있었다. 공원 경내를 오가는 시민들은 외면하듯 찾지 않았다. 간간이 호기심 어린 젊은 연인들 몇 쌍이 묘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오래된 묘비들만이 우두커니 서 있는 괴기로운 광경에 이내 발길을 돌렸다. 오랫동안 누구도 돌보지 않은 듯한 묘비와 묘소. 날짜를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1967년과 68년 두 해 간의 사망기록. 10대 중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수백 명의 사망자 연령대. 낡은 묘비에 박힌 ‘열사’라는 뜻밖의 칭호.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현존하는 충칭 홍위병(紅衛兵) 묘소는 철저히 방치된 채 찾는 이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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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더라도 마음은 마오쩌둥을 받들며’
유명 고등학교와 명문대학들이 몰려 있는 충칭시 사핑빠의 한 공원 안에 자리잡은 문혁묘군(文革墓群)에는 1966년부터 76년까지 중국 전역을 광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404명의 홍위병들이 잠들어 있다.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다니면서, ‘조반유리‘(造反有理·반발에는 이유가 있다), ‘파구입신’(破舊立新·구사회를 파괴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자)이란 구호를 외치며 중국을 뒤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전사인 홍위병.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의 혼령이 잠들어 있는 문혁묘군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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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면적이 2100㎡에 이르는 문혁묘군은 나지막한 언덕과 인공호수를 끼고 있는 명당에 터를 잡고 있다. 콘크리트로 잘 다져진 지반 위에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계단식 묘소 형태인 군묘는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특이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죽어서도 마음은 언제나 마오쩌둥이 있는 베이징을 바라보고 받들려는 의지의 표현’(心向紅太陽)이라고 한다.
문혁 연구자인 후치(42)는 “문혁군묘는 원래 국공내전 당시 사망한 공산당원의 유해 몇 구가 안장된 곳이었다”며 “1967년 6월부터 ‘8·15’ 조직 출신 홍위병 사망자가 하나둘씩 여기에 묻히면서 홍위병을 위한 묘소로 탈바꿈했다”고 전했다. 전체 128좌의 묘소 가운데 113좌가 1967~68년 숨진 홍위병 출신들의 묘소다. 1969년 1월 최후 사망자의 묘소가 조성될 때까지 일부를 제외한 ‘8·15’ 홍위병들은 모두 이곳에 묻혀 있다.
1966년 5월29일 베이징 칭화대 부속중학교에서 처음 조직된 홍위병 운동은 불길처럼 급속히 중국 전역으로 확산됐고, 같은 해 7월 내륙의 변방도시인 충칭을 강타했다. 8월 초부터 충칭시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홍위병 조직은 학교 내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탈권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한 학교 내에서도 여러 개의 분파조직으로 나뉘었던 홍위병들은 기존 당정조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8월15일 이런 국면을 타개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각목으로 무장한 충칭사범대학 내 2개 홍위병 조직이 당정조직 공작조가 지키고 있던 대학 내 공산당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한 것이다. 격렬히 저항하는 공작조에 불리함을 느낀 충칭사범 홍위병들은 곧바로 주변 대학과 중·고등학교 홍위병 조직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4천여 명의 홍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대학 내에서 당정조직원들을 축출한 홍위병들은 이를 기념해 ‘8·15’ 홍위병연합조직을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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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해방군과도 무력충돌
‘8·15’를 중심으로 한 홍위병들의 탈권투쟁은 홍위병 운동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했다. 가장 큰 변화는 홍위병 조직의 확대와 지역 내 권력 장악이다. 우선 학교의 당정 권력을 손에 넣은 홍위병들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거대한 군중 조직으로 변모했다. 학교 내부의 여러 홍위병 조직들이 통합해가면서 확대 개편됐고, 기업과 공장의 탈권 투쟁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학생 신분에서 혁명을 주도하는 조반파가 된 홍위병들은 탈권투쟁 과정에서 점차 내부적으로 의견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급기야 12월4일 충칭 다톈완 경기장에서 열린 ‘자산계급과 반동노선 비판대회‘에서 홍위병 조직이 주도해 문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8·15’ 연합과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학생 출신의 홍위병을 지도해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노동자규찰대’ 간에 주먹질이 오가는 사건이 벌어져 수십 명이 다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충칭의 홍위병 조직은 두 분파로 나뉘어 격렬한 노선 투쟁에 들어갔다.
1967년 2월 ‘8·15’ 홍위병들이 주도해 ‘충칭혁명조반연합위원회’를 조직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도저’(反到底)라는 또 다른 연합조직을 건설한다. 당시만 해도 두 홍위병 분파 간의 투쟁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권고한 ‘글로 싸울 것이며, 무력으로 싸우지 말라’는 강령처럼 토론을 통한 투쟁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4월 당정조직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혁명위원회 간부 선출을 두고 두 분파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홍위병 조직 간의 마찰은 끝내 무력투쟁으로 치달았다.
홍위병 분파 간 무력투쟁에 불을 댕긴 것은 문혁을 일으킨 ‘4인방’이었다. 4인방의 일원이었던 장칭은 7월22일 허난성 홍위병 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한 홍위병 조직이 ‘문공무위’(글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지킨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는데 그 구호는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문회보>에서는 이런 사실을 보도하면서 ‘문공무위’ 구호를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다. 이때부터 홍위병 분파 간 혹은 조반파 분파 간 무력투쟁은 공식적으로 정당화되고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4인방으로부터 이론적인 근거까지 얻은 충칭 홍위병들의 무력투쟁은 8월에 접어들면서 극에 달해, 인민해방군과 직접 충돌을 빚기도 했다. 1989년 충칭시 지방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충칭대사기>를 보면, 1967~68년 발생한 ‘8·15’와 ‘반도저’ 분파 간의 무력투쟁은 규모가 큰 것만 31차례다. 기관총·박격포·곡사포·탱크·함선 등 중화기를 동원한 전투만 24차례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1만여 발의 포탄이 전투 중 사용됐는데, 당시 충칭 홍위병의 무력투쟁은 중국 최대 규모였다.
버려진 홍위병 묘소에 안식하고 있는 404명 희생자들은 대부분 10~20대의 젊은이다. 가장 어린 매장자는 14살이다. 35%가 학생이고 59%가 노동자였던 이들 홍위병이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은 며칠 전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던 벗이었다. 암울한 시대를 헤쳐 살아남은 홍위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받들었던 마오쩌둥과 자신들을 지도했던 4인방에게도 버림받는다. 1968년 8월부터 마오쩌둥과 4인방이 파견한 노동자와 인민해방군 선전대는 충칭 각 학교에 진입해 홍위병들을 무장해제하고 계파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전국적으로 시행된 하방정책에 따라 홍위병들은 농촌으로 쫓겨났다.
머리나 신체 한 부위만 있었던 시신들
문혁묘소에서 만난 ‘8·15’ 조직 홍위병 출신인 랴오(63) 노인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자책한다. 문혁묘군에 사망한 홍위병 동료를 직접 묻었다는 그는 “당시를 생각하면 공포만이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랴오는 “전투에서 죽은 동료들의 주검을 수습한 뒤 여기로 가져와 몇 개의 큰 갱을 파고 관도 없이 주검 수십 구를 한꺼번에 매장한 뒤 흙과 시멘트로 덮었다”면서 “격렬한 전투 때문에 머리나 신체 한 부위만 있는데다 날씨가 더워 온통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당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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