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단체가 이뤄낸 ‘5·17 공동성명’에 딴죽 거는 일본의 보수언론들… 북한 개입설 등 내놓으며 ‘납치문제’ 해결 저해할까 걱정하는 분위기
▣ 도쿄=황자혜 전문위원 jahyeh@hanmail.net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난 5월17일.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이다바시에 위치한 조총련 중앙본부에는 뜻깊은 ‘잔칫상’이 차려졌다. 그것도 1946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창설과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 조직 이후 처음으로 말이다. “민족적 단결과 통일로 나아가는 민족사의 흐름에 맞춰 두 단체의 반목과 대립을 화해와 화합으로 전환시키겠다”는 취지로 두 단체가 함께 차려낸 잔칫상. 바로 ‘총련·민단 5·17 공동성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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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의 교시는 없었는가?
‘반세기 만의 역사적 화해’로 불릴 만한 뜻깊은 잔칫상의 맛깔스러운 음식 메뉴는 다음의 6가지다. 1) 재일동포 사회의 단합을 위한 협력. 2) 6·15 남북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적 운동에 동참해나가며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일본지역위원회 대표단’ 성원으로 참가. 3) 8·15 기념축제 공동 개최. 4) 교육과 민족문화 진흥사업에 공동 노력. 5) 동포사회의 제반 대책과 복지활동 및 권익옹호 확대를 위한 협조. 6) 합의사항 해결을 위한 창구 설치, 수시 협의.
그러나 힘겹게 잔칫상을 차려내도, 축하에 앞서 딴죽 걸고 심지어 잔치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투정하는 손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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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발표 현장에 몰려든 200여 명의 국내외 보도진 가운데 <요미우리신문> 기자가 질문한 내용은 “최근 재외교포에 관한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는 없었는가?”였다. 총련 쪽은 “없다. 만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오늘 만남에 직접 관계없는 질문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인 ‘6·15 공동선언’에 이은 2006년의 재일 남북 두 단체의 정상회담과, 그 결과로 발표된 ‘5·17 총련·민단 공동성명’의 의미를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않고 딴죽을 거는 일본 보수언론의 진정한 관심은 무엇이고 인식 수준은 어떤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5·17 공동성명’ 취재 현장에서 있던 한 일본인 기자는 “북한 정권이 뭔가 이용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을 품은 채 총련 건물 안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벽화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하던 일본 언론인들과 달리 양쪽 대표들은 통일 브로치를 달고 화해를 자축하는 자연스런 미소를 보여 오히려 더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고이즈미 정부는 대대적인 미디어 선전을 통해 국민의 최대 관심사를 ‘납치 문제’로 굳혀왔다. 납치 문제는 곧 고이즈미 정부 ‘자동 지지 장치’이자 ‘무장 정당화 카드’로 작용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5·17 공동성명’에 대해 일본 정부 대변인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총련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동향을 충분히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의 화해를 잇는 진전으로 평가한 <아카하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언론들은 △민단계 자금이 총련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재건에 사용될 가능성 △납치와 핵 문제에서 한-일 양국의 연대가 흔들릴 가능성 등에 관심을 보였다.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요소보다는 자신들의 납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저해’ 요소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식이다.
<산케이> 사설 “민단의 총련화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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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8일〈산케이신문>의 사설은 한술 더 떠 “민단의 ‘총련화’가 걱정”이라고 썼다. “역사적 화해인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며 “일-한 납치 피해자 가족의 연계가 한층 강해진 시점에 민단과 총련이 화해한 것도 납치 문제 해결에는 우려 요소”라는 것이다.
이날 도쿄 시내에서 만난 시민 아리즈카 사토시(62)는 <산케이신문> 사설에 대해 “이게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말했다. “재일동포 문제가 아무리 1면에 등장해도 민단이나 총련을 제대로 아는 일본인이 1할도 안 되는 사회라지만, 화해하고 협력하겠다는데 우려된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 그는 매일 아침 대부분의 일간신문을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 정도의 연배라면 청년 시절 재일 조선인 친구가 한둘은 있다”면서 “일본 사회의 약자로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따로따로여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기실 양쪽 중앙위 구성원들의 환한 미소의 ‘진정성’은 2000년 ‘6·15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향한 공동성명’ 발표 이후 지금껏 한반도에 ‘긴장’이 아닌 ‘화해’와 ‘협력’이 현실화하고 있는 데 이어 그 분위기가 일본 열도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데 있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를 종단해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로가 열리고, 해상을 통한 남북 왕래가 잦아지고, 남북 공동사업의 하나로 끊겼던 철도를 연결하는 공사가 완료돼 이제 시험주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본국이 화해와 통일로 향하는데 재일동포 사회가 분단을 지향할 이유가 없다는 게 이번 공동성명 발표의 숨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민단과 총련의 회담은 재일동포 사회에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못잖은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오사카·홋카이도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이미 총련과 민단이 함께 행사를 주관하며 노력해온 지역적 성과에 힘입은, 두 단체 중앙위의 결단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올해 2월 새롭게 구성된 민단의 하병옥 단장 등 집행부는 동포 사이의 화합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정치적 문제를 언급하기 이전에 전제조건 없이 우선 만나 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다. 당시 하 단장은 “필요하다면 스스로 총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간의 대립과 이후의 화해를 위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밝혔고, 지난 4월 총련 쪽에 ‘6·15 공동선언 실천 일본지역위원회’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보낸 뒤 양쪽 간의 대화가 꾸준히 이어졌다.
공동성명에 앞서 하 단장은 “사실 늦은 감이 있다”며 “지역에서는 몇 년 전부터 총련과 민단이 어울려 지역행사, 동포행사도 하고 있는데, 중앙에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빨리 이런 자리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는데 많이 아쉬웠다”고 술회해 그간의 중앙 단위의 고민을 숨기지 않았다.
6월과 8월에 당장 가시적인 성과
지금껏 일관되게 재일동포들의 권익과 ‘민족교육’에 힘을 쏟아온 총련의 서만술 의장도 “이제 우리가 손을 잡고 우리 후손에게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줘야 한다”며 “앞으로 우리가 동포들의 삶과 민족교육 등에 대해 어떻게 협력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화답했다.
두 단체가 합의한 성명 내용 중 6·15 평화축전, 8·15 기념행사 등 민족 당사자가 함께 기념해야 할 행사에 통일단위를 구성해 참가하는 사업은 가장 먼저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날 전망이다. 더불어 재일동포 사회에 더없이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재일동포의 교육, 문화사업 및 제반 복지와 권익의 옹호,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함께 해나가자고 합의한 데 의의가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현지 동포들이 반기는 이유다.
지금까지 긴 반목의 역사가 있었던 만큼, 총련과 민단의 공동성명은 어찌 보면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북의 화해와 민단·총련의 화해가 일본의 납치 문제 해결의 ‘우려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납치 문제를 어떻게 ‘이용’할까 혈안이 돼 있는 ‘겉과 속이 다른’ 일본 정부와 보수언론이 오히려 일본 사회에는 ‘우려 요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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