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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리비아 모델’을 거부하나

등록 2006-05-26 00:00 수정 2020-05-03 04:24

북한에 따라해보라 주장하지만 실제 딴청 피우는 쪽은 미국…부시가 먼저 직접협상 제안하고 경제 제재 수위를 낮춘다면…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peace@peacekorea.org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관계 정상화 조치를 취하기로 하면서, 또다시 ‘리비아 모델’이 관심을 끌고 있다. 리비아 모델은 ‘선 대량살상무기 포기, 후 관계 정상화’를 일컫는데, 2003년 12월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일각에선 북한도 이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그 뒤 잠잠하던 관련 논의가 5월15일 미 국무부가 리비아와의 외교 관계 완전 복원을 발표하면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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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리비아가 친구가 된 이유

관심의 초점은 리비아 모델이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에 끼칠 영향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은 “리비아는 북한과 이란 같은 나라에 중요한 모델”이라며, “2003년이 리비아 국민들에게 전환점이 됐던 것처럼 2006년은 북한과 이란 국민들에게도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 역시 5월17일 내외신 기자 브리핑에서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를 스스로 포기해 미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받게 됐다”며 “정부는 북한이 핵 포기시 자신들에게 밝고 좋은 미래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조속히 6자회담에 복귀해 북핵 문제가 빨리 해결되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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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이 리비아와 관계 정상화를 하기로 한 데는 대량살상무기 포기 외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있다. 9·11 테러 이후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테러와의 전쟁’에 리비아의 협력이 필요했고, 리비아가 주요 산유국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부시 행정부는 리비아와 ‘친구’가 되고자 하는 동기가 강했던 반면 북한에 대해선 여전히 ‘적’으로 남겨두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정권 교체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리비아 모델을 거부하는 쪽은 북한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과 리비아의 협상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이 북한과 리비아를 대하는 태도가 판이함을 알 수 있다. 우선 부시 행정부는 리비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대량살상무기 포기와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는 방식으로 협상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선 ‘직접 협상’도 거부해왔고, 핵 포기 유인책을 확실히 제시하지 않아왔다.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절실했던 리비아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전인 2003년 3월 초 미·영과 비밀협상에 들어갔고, 관계 정상화를 약속받아내자 2003년 12월19일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라크 다음은 우리’란 두려움 때문에 대량살상무기 포기에 나선 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 협상과 확실한 인센티브 제공에 따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과 리비아는 협상을 진행하면서 합의한 사항을 서로 이행함으로써 신뢰를 쌓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관계 개선을 위한 접촉에 들어간 두 나라는 가다피 정권이 팬암 103기 폭파 사건을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미국은 유엔의 리비아 제재 해제에 동의하는 등 신뢰 구축 조치를 밟아왔다.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와 미국의 관계 정상화 결정은 이런 약속 이행에 기초한 신뢰 구축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반면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제네바 합의 이행에 지지부진한 태도로 일관했고,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이니 ‘폭정의 전초기지’ 등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 대상에 포함해 북한의 불신을 배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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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가 전임 정부의 리비아와의 협상 내용은 ‘계승’했지만, 북한과의 협상 내용은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클린턴 행정부 막바지에 북-미는 미사일 문제 해결을 포함한 중요 현안에 대체로 합의점에 도달하면서, 관계 정상화와 평화 체제 구축 의사까지 담은 ‘조-미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한 바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위협을 빌미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 군사적 기득권을 강화하고, 적절한 시점에 북한을 제거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실질적으로 리비아 모델를 거부하는 당사자는 부시 행정부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미국이 2005년 이라크에 이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시키기로 함으로써, 이제 미국이 지목한 테러지원국은 북한을 비롯해 이란, 쿠바, 수단 그리고 시리아 등 5개국이 남게 됐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이후 어떠한 테러 행위도 지원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9·11 테러 이후에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의혹을 테러지원국 재지정의 이유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위조 지폐와 마약 등 ‘불법활동’과 일본인 납치 문제, 그리고 다른 국적의 외국인들의 납치 의혹도 테러지원국 유지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 제재와 직결된 테러지원국 지정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남게 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는 ‘부정적 이미지’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테러지원국 지정은 경제 제재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부분적으로 완화했지만, ‘테러지원국’으로 계속 지정함으로써 경제 제재 완화의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다.

미국이 한 국가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면 크게 네 가지 조치가 취해진다. 무기 관련 수출 및 판매 금지, 이중용도 품목 수출 통제, 경제지원 금지, 금융 등에 대한 제한 조치 부과가 그것이다. 이는 역으로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할 경우, 북한은 경제난 해소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금융기관의 차관 지원 금지 조치가 해제됨으로써 북한이 국제자금을 통해 경제를 회복하는 숨통을 열 수도 있다.

수출입은행법 등에 따른 원조와 금융거래 금지 해제는 미국 기업인은 물론 국제 사회의 대북 투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무역거래 또한 활성화될 수 있다. 또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해제는 북한 상품에 부과한 초고율 관세의 인하로 이어져, 북한의 대미 수출이 늘어날 수 있다. 아울러 미국의 수출통제 품목이 대폭 완화돼 북한에 대한 설비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전략물자통제 체제에 걸려 있는 남북경협도 탄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는 테러지원국 해제의 문턱을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및 금융과 선박 등 경제 제재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의 대화 요구에는 ‘악의적인 무시’로, 제재 해제 요구에는 제재 강화로 일관하는 부시 행정부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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