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왜 1976년생은 건너뛴 거지?

등록 2005-09-15 00:00 수정 2020-05-03 04:24

[90년대의 추억_드라마]

최진실도 심은하도 고소영도 다 싫다고 심술을 부리고 싶다
벌써 전지현·이나영·강동원·현빈 같은 80년대생들에 열광하다니…

▣ 강명석/ 문화평론가

난 최진실이 싫다. 심은하도 싫다. 고소영도 싫다. 물론, 드라마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심은하가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열렬히 환영할 것이고, 다시 돌아와준 고현정에게 감사한다.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건 지극히 편협하고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10년 전, ‘X세대’니 ‘신세대’니 하는 말들은 거의 신드롬처럼 사회를 뒤덮었고, 막 전성기를 시작한 그들은 신세대의 상징이 됐다. 아예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라는 <질투>로 톱스타가 된 최진실의 별명은 ‘신세대 요정’이었고, 고소영은 ‘당돌한 신세대 여성’이었으며, 심은하가 스타가 된 건 당시 모든 남학생들의 꿈을 덩크슛으로 바꿔버린 ‘슬램덩크’의 영향을 받은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부터였다. 그리고 그 ‘누나들’에게 열광하던 76년생 고등학생이 서른이 되는 지금까지, 그들은 여전히 톱스타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난 그게 불만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없었다고요

왜 그 누나들만 10년 동안 톱스타를 해야 했을까. 최진실과 고소영, 장동건과 배용준, 서태지와 신승훈이 연예계의 아이콘 자리를 유지하는 동안, 내 또래의 연예인들은 좀처럼 그들의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그나마 고교생 때부터 헉 소리 나는 미모를 인정받아 일찍 눈에 띈 김희선 정도가 예외였다. 그리고 최진실이 아줌마 파마를 하고 <장밋빛 인생>에 나올 때쯤 되니, 사람들은 1976년생들을 건너뛰고 곧장 언제 태어났는지도 몰랐던 80년대생 전지현과 이나영, 강동원과 현빈에게 열광한다.

386세대, X세대, N세대. 세대를 위한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우리를 위한 이름은 없었다. 우리는 신세대가 입에 오르내릴 때는 아직 고교생이었고, N세대는 1976년생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의 ‘애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곧 리메이크하는 <사랑과 야망>의 원작도 보았고, 반대로 <위기의 주부들> 같은 외국 드라마나 <논스톱>도 즐겨 볼 수 있다. 그 대신 저것이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큼 우리의 ‘애매한’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은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그래서 딱 서른살짜리 여자가 주인공이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 반가웠다).

괜한 심술이란 건 안다. 하지만 한창 취업해야 할 때 IMF와 불황을 겪었고, 직장에 들어가니 경기 호황 당시 입사해 자리를 굳히고 있는 선배들과, ‘아예 다른’ 사고방식을 인정받기 시작한 80년대생들을 보며 이상한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이상한 거리감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왜 드라마에서까지 우리는 주인공으로 잘 안 나오는 거냐고요. 서른살짜리 배역은 서른살한테 시켜야지 왜 나이 많은 톱스타나 댓살은 더 어린 애들이 연기하냐고요. 어쩌면 우리는 김선아나 김정은처럼, 오랫동안 경쟁에서 ‘살아남았’다가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하는 게 최선인 운명인 걸까. 그래도 가끔은 톱스타도 해보고 싶은데. 정말, 이런 생각까지 하는 걸 보면 내가 서른이 되긴 됐나 보다. 이번 추석엔 조카들한테 용돈도 줘야 할 텐데.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