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추억_패션&스타일]
톰 포드의 센세이셔널한 데뷔 뒤 미니멀하고 동양적인 스타일이 장악
여성스럽고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던 이들에겐 암흑같은 백년전쟁기였네
▣ 서은영/ 스타일리스트
짜릿했다. 아니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새틴 소재의 그린 컬러 셔츠와 알파카(양털로 만들어진 울 소재) 소재의 더블 버튼 코트, 그리고 네이비 컬러의 벨벳 벨 보텀(바지 밑단이 살짝 퍼지는 일명 나팔 바지), 여기에 새롭게 디자인된 지(G) 버클이 장식된 와인 컬러의 페이턴트(반짝거리는 가죽 소재로 일명 에나멜이라고 불리는 소재), 백과 부츠. 기막히게 세련된 이 스타일을 입고, 스모키 아이(눈 주위를 검게 칠하는 매우 섹시한 화장법)를 짙게 한 앰버 발레타(이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슈퍼 모델)가 어두운 런웨이를 걸어나올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마돈나마저 기모노 스타일을 입고…
1995년 가을·겨울 밀라노 컬렉션. 아줌마 브랜드로 전락했던 구치가 톰 포드라는 무명 디자이너를 수석 디자이너로 과감하게 영입하며 화려한 구치 제국을 부활시키는 순간이었다. 톰 포드가 만들어낸 구치의 여성상은 그야말로 당당함과 섹시함,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가 극에서 극으로 보여진다. 정부(情夫)를 네댓은 두었을 것 같은 매력적인 구치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간만에 ‘대박’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장 폴 고티에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스타급 디자이너도 없이 패션계는 점차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기도 한 이브 생 로랑이나 지방시를 패션계의 제왕으로 내세우기엔 그들은 이미 늙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톰 포드는 한번의 쇼로 스타가 되었고, 그가 보여준 컬렉션으로 인해 새로운 패션 세계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미우치아 프라다, 지아니 베르사체도 이 시기에 두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성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스타일의 프라다, 남편을 다섯은 독살했을 것같이 지독하게 섹시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베르사체는 상반되는 스타일이지만 서로의 기운에 힘입어 밀라노 컬렉션을 막강한 힘의 근원지로 만들어갔다.
이렇게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로 만연했던 9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점차 디자이너들은 ‘절제의 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패션이란 극도로 화려하거나 여성성을 강조한 스타일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불안해져가는 세계의 정세와 새롭게 시작할 21세기를 앞두고 사람들은 더욱 미니멀해지고 동양적인 철학에 빠져들게 된다. 90년대 후반은 바야흐로 미래지향적인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동양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젠(Zen) 스타일이 조용하면서도 급속하게 패션계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실용성을 가미한 스포티브 스타일과 중동 전쟁에서 비롯된 밀리터리 룩이 합세해 여성스러운 스타일은 법에 어긋나는 일인 것처럼 사람들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돈나마저도 알렉산더 맥퀸이 디자인한 기모노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필자에게서 이 시기는 백년전쟁만큼 어두운 암흑의 시대였다. 화려하고 여성스럽고, 지극히 장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필자는 너무 힘들어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하이힐을 신고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필자에게 90년대 후반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암흑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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