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의 빛나는 역사를 지닌 중국 타이항산 자락의 오지마을
한-중 두나라 문인들이 손잡고 김학철·김사량 작가의 항일문학비를 세우다
▣ 후자좡=글 · 사진 김문음/ 방송작가·허브넷 다큐멘터리팀 whanita@freechal.com
2005년 8월5일 아침.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자락의 작은 마을 후자좡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붉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좁은 시골길 양쪽에서 ‘뉘앙걸’이라 부르는 환영의 춤을 추고, 마을 어린이들은 오랫동안 연습해온 한국말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모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는 순간이었다.
약산 김원봉이 이끈 조선의용군
같은 시간, 마을 입구 밭을 깎아 만든 작은 공터에서는 김학철·김사량 두 작가의 항일문학비 제막식이 중국과 한국 두 나라 언어로 진행됐다. 문학비 제막식은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모임’(작가모임)이 5일 중국 허베이성 작가협회, 중국 옌볜 작가협회와 공동으로 기획해 이뤄졌다.
문학비에는 ‘김학철 항일문학비’ ‘김사량 항일문학비’라는 글자가 ‘한문’으로 또렷이 새겨져 있다. 작가모임 대표 김영현씨는 “이곳은 64년 전, 조선 청년들과 중국 군대가 어깨 걸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던 곳”이라며 “지난 역사를 추억하는 것은 지금의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한 오지 마을에 낮선 이름의 두 작가의 문학비가 세워지는 까닭은 뭘까. 마을 사람들은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을 왜 이렇게 반기는가.
후자좡 마을과 우리 민족의 인연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동안 남한 정부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에만 초점을 맞춰왔고, 북한은 지난 1956년 8월 ‘종파사건’ 등으로 옌안파를 숙청한 뒤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기억에서 지웠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민정부(국민당)의 지원 아래 중국 후베이성 무한에서 창설됐다. 의용대 주력은 2년7개월 정도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여름 공산당 지구로 이동해 그해 7월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조선의용대에는 중국이 고급 엘리트 장교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의 대장은 1920년대 ‘의열 투쟁’(테러)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의열단 대장 약산 김원봉(1898~1958)으로,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는 중도주의자였다.
중국 공산당 지구로 이동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이 무렵 타이항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가장 극렬한 전투를 벌인다. 이들은 1년 뒤인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이름을 바꿨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는 2001년 펴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에서 “그 1년이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7년 항일 역사 가운데 일본과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시기”라고 적었다. 이때 조선의용군 역사의 꽃인 후자좡 전투가 벌어졌으며, 박철동·이만갑·손일봉 등 조선의용대원 4명이 붉은 피를 흘리며 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뒀다.
대원들의 주검을 100리 밖에 묻어주다
후자좡 마을은 16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산마을로 ‘후’(胡)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은 베이징 남쪽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에서 서남쪽으로 49km 떨어진 타이항산 산맥 기슭에 있다. 마을은 6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궁핍했다. 주민들과 조선 청년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고, 약품도 변변히 없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조선의용군은 ‘자신이 조선의 대표’라는 생각으로 모범적으로 처신했다.
김학철은 <항전별곡>이나 <격정시대> 같은 작품에서 후자좡 전투의 뼈아픈 기억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1941년 12월12일 새벽, 이틀 전 전투의 승리에 도취돼 있던 김학철 분대는 적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이때 의용대원 4명이 숨졌고,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됐다. 이때 같이 부상당한 김세광 대장은 부상당한 채 대원들을 이끌고 타이항산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김학철은 이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3년6개월 뒤 한쪽 다리를 자르게 된다.
후자좡 마을 사람들은 조선 청년들과의 사연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존 노인들은 그들이 실제로 지켜본 무용담을, 40~50대 장년들은 그들이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낯선 방문객에게 전했다. 순박한 산간 마을 사람들은 팔로군과 의용대원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정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친구들을 얼마나 아꼈는데.” 호취금(81)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전사한 의용대원 4명의 주검을 일본군들이 들어와 훼손할까봐 100리 밖으로 옮겨 묻어주었다. 의용군을 포위한 일본군의 총소리를 듣고 맹렬히 달려왔던 팔로군 12명도 이날 나란히 목숨을 잃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한 시간 반의 거리였다.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을 64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조선 청년들의 주검을 이곳까지 옮겨온 것일까. 호 할아버지는 “그때 12월이라 날씨가 무지 추웠다”며 “일본군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산을 넘고 또 넘어 조선 청년들의 주검을 이곳에 묻었다.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킨 셈이다. 그렇지만 ‘후자좡의 비극’을 통해 조선인들의 대일 항전의 의지가 다시 한번 대외에 알려지게 됐다. 김구·한국독립당의 정치적 자산이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라면, 조선의용군은 후자좡 전투를 자랑스레 입에 올릴 수 있게 된 셈이다. 1946년 3월13일치 <연변일보>를 보면, “연변 조양천 거주 수만명의 조선인들은 1946년 3월1일 3·1절 기념식을 조선의용대 교도대 운동장에서 거행했는데, 이날 의용군 대원들이 연극에 올린 것은 ‘후자좡 전투’였다”고 적고 있다.
동북민주연합군에 흡수됐다가 북한으로
김학철은 그의 자서전에서 “60여년 전에는 좌, 우가 달라도 마음이 통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좌익화돼가고 있었지만, 광복군의 태극기를 보면 마음이 설레었다. 타이항산 방면으로 부대 이동을 할 무렵 김승곤이라는 대원은 공산당 진영으로 들어가기를 꺼려 탈영해 광복군 진영으로 갔지만 의용대의 진로를 신고하지 않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손잡고 싸운 ‘독립군으로서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그 ‘한 발짝의 여유’를 되살릴 순 없을까.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은 결국 실패한 역사였다. 우리는 우리 힘이 아닌 미국이 일본에 터뜨린 핵폭탄의 힘을 빌려 해방을 맞았다. 조선의용군은 1946년 2~3월께 중국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조선의용군’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동북민주연합군(훗날 중국인민해방군)에 흡수됐다. 국공내전을 거치며 병사 수를 늘리는 데 성공한 그 주력(중국인민해방군 166·164사단)들은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한 뒤 ‘통일 전쟁’을 위해 북한으로 이동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인 한국전쟁이었다.
그렇지만 중국 허베이성 작은 마을 후자좡에서, 커다란 악조건을 이기고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기 전, 가장 극악한 식민의 조건과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한·중·일 세 나라를 넘나들며 ‘자존의 길’을 찾아갔던 김학철·김사량 두 문학인의 비를 세운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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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들, 이제야 왔는가 |
“독립 위해 그토록 피흘렸는데, 후세 사람들은 어찌 그리 무심한가”
중국 스자좡시 후자좡 마을의 촌장 이름은 후아이차오(50·胡愛朝)다. 형의 이름은 시차오(喜朝)다. 가운데 글자가 다르지만 뜻은 같다. ‘조선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후 촌장은 “마을 사람들과 조선의용군 청년들은 항일 정신으로 똘똘 뭉쳐 형제처럼 지냈다”며 “이름 없이 스러져간 조선 청년들의 얘기가 많이 다뤄져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학비를 건립하게 된 소감은.
=참 기쁘고 다행한 일이지만, 조금 늦은 것 같아 섭섭하다. 우리 부모님들이 당신들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가. 독립을 위해 어린 청년들이 피 흘리며 죽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무심하나 싶었다. 그때 죽은 조선 청년의 주검들을 마을 사람들이 목숨 걸고 잘 묻어줬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선 청년들의 모습은 어땠는가.
=세 가지 언어에 정통한 청년들이었다고 들었다. 자기들끼리 말할 때는 한국말을 쓰고, 우리와 말할 때는 중국어로 하고, 일본군을 상대로 교란 작전을 할 때는 일본어를 썼다. 아주 똑똑하고 재미있는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청년들이 고향 얘기를 하거나, 일본놈들에게 당한 얘기를 할 땐 함께 울기도 했다(이런 모습은 김사량의 <노마만리>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금도 어렵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게 살았다. 겨울에는 방이 부족해 촌민들에게 방을 내주고, 청년들은 밖에서 잤다. 노인들이 가여운 마음에 솜이불을 덮어주면 청년들은 노인들을 위한다고 방에 다시 들어와 이불을 돌려주곤 했다. 그래서 밤새 이불 싸움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때 얘기를 하며 자주 울었다.
무용담도 있나.
=그렇다.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일본놈들이 어떻게 몰려오고, 조선 청년들이 어떻게 도망가고, 어떻게 싸우다 희생됐는지 다 들었다. 손일봉, 박길동 이런 이름들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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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량·김학철은 누구인가 |
김사량(1914~50)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작가의 이름이다. 그는 평양의 부농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10월에 발표한 소설 <빛 속으로>가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 아쿠다가와상 후보(1940년 상반기)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1945년 2월 ‘조선 출신 학도병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틈을 타, 베이징에서 탈출해 항일 조선인 부대가 활동 중인 타이항산으로 망명했다. 그 망명 여정을 읊은 소설이 ‘당나귀를 타고 만리를 가다’는 뜻의 <노마만리>다. 6·25 때 종군기자로 마산까지 내려왔지만, 북상하는 국군과 미군에 쫓겨 원주 부근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김재용 원광대(국문학) 교수는 “김사량은 엄혹했던 시기 몸으로 부딪혀 직접 일제와 맞선 대표적인 저항작가”라고 말했다.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을 때, 그의 아들의 나이는 다섯살이었다.
김학철(1916~2001)이 한국 문학사에서 갖는 위치는 특별하고 독보적이다. 그는 1916년 원산에서 태어나 1932년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중국의 엘리트 장교 양성소인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정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1941년 12월12일 허베이성 후자좡 전투에서 다리 관통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4년 뒤 일본 감옥에서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옌볜 인민출판사가 2002년 펴낸 <20세기 중국 조선족문학사료 전집>은 그의 일생에 대해 “선생은 투사와 작가라는 이중 배역을 운명적으로 받아 안아, 항일 투쟁에 직접 뛰어들었고 한 다리를 잃은 다음부터는 손에 붓을 들고 문학 창작에 전생을 다 바쳤다”고 적었다. 그는 ‘옌안파’로 몰려 북에서 핍박을 받았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반동분자’로 몰려 10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장편소설 <격정시대>와 <항전별곡> 등 수많은 소설·수필·잡문을 창작했다. 김재용 교수는 “그가 없었다면 조선의용군의 활발한 독립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사각지대로 남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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