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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명 학살’논란, 형식적 조사

등록 2000-12-20 00:00 수정 2020-05-02 04:21

이 입수한 또 하나의 미군 비밀보고서, 결론은 “증거 없음”

700명.

1970년 1월22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협상가이며 외무장관인 응웬 티 빈(Nguyen Thi Binh)은 제51차 파리 평화협상회담 자리에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이틀 동안 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바로 를 통해 세계에 타전됐다.
당연히 미 국무부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그 다음날인 1월23일, 국무부는 주월 미국대사관을 경유하여 주월미군사령부에 이 ‘학살 의혹’에 관한 정보를 요구한다. 그리고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조사가 실시된다.
은 또 하나의 미군 비밀보고서를 찾아냈다. 지난 11월24일 메릴랜드에 있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이 30여장 분량의 비밀보고서는 지난 6월 30년 만에 비밀해제된 것으로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이 당시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 끊임없이 논란거리가 됐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이 지난 334호에서 처음 보도했던 미군 비밀보고서는 69년 12월과 70년 1월까지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와 주월미군사령관 및 군부 고위장성 사이에 오간 것이었다. 퐁니·퐁넛 사건 등 3건의 ‘한국군 학살 의혹’에 대한 이 조사보고가 마무리될 무렵, 또다른 학살 의혹이 터진 것이다. 이는 이번에 새로 발견된 비밀문서의 시점이 70년 1월30일부터 시작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학살 의혹이 있었던 곳은 베트남 중부지방인 쿠앙남(Quang Nam)성 쿠에선(Que Son)현이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응웬 티 빈은 “빈꾸앙(Binh Quang), 빈치에우(Binh Trieu), 빈호아(Binh Hoa), 빈다오(Binh Dao), 빈장(Binh Giang) 등 5개 마을에서 69년 11월11일과 12일 이틀간 7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바다호랑이’(Sea Tiger)라고 명명된 작전에서 학살이 저질러졌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발행한 ‘남부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자료에도 날짜와 지역명, 피해숫자가 정확히 똑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2월10일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 고위장교 로버트 쿡이 주월미군사령부 참모장 타운젠트(Elias C.Townsend)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의 감찰관 3명은 배경정보를 얻기 위하여 70년 2월5일, 6일, 7일 다낭 지역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조사반은 문제의 날짜와 장소에서 있었던 작전이 한국 해병대의 ‘승룡작전’임을 밝혔다. “1969년 11월11일 한국군은 쿠앙남, 쿠앙틴성에서 수색작전을 평상적으로 실시하였으나 적군을 만나지는 못했다. 1969년 11월12일 전술작전에서 9중대, 10중대, 11중대, 25중대, 26중대로 이뤄진 3대대가 쿠앙남, 쿠앙틴성에서 베트콩군을 만나 34명을 사살하고 155명을 생포했다. 생포된 적군은 미군 헬기로 후송됐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확인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추어 본 조사는 한국 해병대가 쿠앙남성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조사는 충실했는가.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무성의하고 형식적 조사에 그쳤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는 주월한국군 사령부에 “해당 한국군 부대원들을 조사해달라”는 요청을 하지도 않았으며, 더더욱 베트남 피해자들을 단 한명도 인터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작전에 참여한 미군 헬기수송 책임자와 전차부대원들을 면담했을 뿐이다. 물론 그들은 ‘한국군의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 334호에서 보도했던 대로 70년 1월10일 는 “하와이대 인류학과 박사과정 테리 램보(Terry Rambo)가 ‘국방부 고위장성으로부터 한국군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그 직후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미 국무장관은 즉각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한국군 관련 사건에 관한 보고서가 절대로 절대로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주일도 안 돼, 상당한 규모라 할 수 있는 ‘700명 학살 의혹’이 언론보도를 타고 말았다. 미국은 이 ‘민감한 사안’을 서둘러 봉합한 것일까?
‘증거 없음’으로 조사결과는 나오고 말았지만, 작전과정에 참여했던 진 그룰러(Jean A. Grurler) 소령이 감찰부에 남긴 진술은 조금의 여운을 남긴다. “1969년 11월12일 나는 작전명령을 부여받았다. 한국군을 작전지역으로 헬기 수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작전 수행과정중 적군과의 교전은 없었다. 그 이후 한국군 중대마다 미군 해병 연락병이 배속되었다. 나는 그 연락병들로부터 한국군의 동태에 무선보고를 받았다. 나의 연락병들은 한국군들의 민간인학살에 관해 전혀 보고한 바가 없다. 학살이 일어났더라면 연락병들이 보고를 했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100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심문 목적으로 후송시킨 것이다. 이들은 미군 해병대 헬기를 통해 한국군 10중대 주둔지역인 북베리어섬으로 후송됐다. 민간인들이 후송된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 해군본부가 발행한 제3집 월남편 제3권은 해당 작전이 승룡17-1호와 승룡17-11호 작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민활동’과 관련해 는 이렇게 쓰고 있다. “주민들은 게릴라들의 가족과 동조자들로 판단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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