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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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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서다 하면 투자를 어찌 하나”

등록 2005-03-02 00:00 수정 2020-05-02 04:24

개성공단과 금강산 사업을 뺀 경협사업 거의 빈사 상태… 민간 차원의 대북 사업 물꼬 터줘야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남북경협이 피로감에 깊이 빠져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1991년 이후부터 지난해까지 통일부로부터 대북 투자가 가능한 협력사업 승인을 얻은 기업은 개성공단 15개 입주 기업을 포함해 모두 52개에 이른다. 그러나 지금 북에서 정상적 생산활동을 벌이고 있는 기업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정부 우산을 쓰고 있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뺀 다른 일반 경협사업들은 거의 빈사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런 탓에 북한 투자를 통해 남북 상생의 길을 여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했던 많은 기업인들이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개성 외 지역 투자에 관심 없는가

5년째 대북사업을 추진해온 한 기업인은 “좋은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려면 전력이 끊김이 없이 일정하게 공급되어야 하듯이 남북경협도 성공을 보장하려면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북한 사업은 기대할 게 없는 셈”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임완근 남북경협진흥원 원장은 남북한 기업인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불신감을 남북경협의 최대 장애물로 꼽는다. 그는 “돌출변수가 너무 많다 보니 서로 경협에 대한 신뢰감을 갖지 못하면서 불신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면서 “신뢰 회복을 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성공적인 남북경협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북한 당국의 일관성 있는 경협 지원이 아쉽다는 지적이다.

특히 남쪽 정부의 좀더 과감한 지원 조처 없이 남북경협은 한동안 더 밑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견해가 거세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대북 협력사업을 추진해온 한 기업인은 “북한이 먼저 돌파구를 열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라면서 “남쪽 정부에서 자꾸 대안을 제시해주면서 이끌어줘야 북한이 따라올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남쪽의 민간기업들이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다. 남쪽 정부가 남북경협 시장에 신뢰를 심어줘야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으나 지금은 정부가 신뢰를 주지 않는다는 게 기업인들의 불만이다. 정부가 개성공단 등 특정 대규모 프로젝트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다른 기업의 개성 외 지역 투자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탓에 어렵사리 독자적으로 대북 협상 채널을 구축하고 사업을 벌여온 기업들은 그동안 투자해놓은 것들까지 포기하면서 등을 돌리고 있다. 사실 노무현 정부는 나름대로 기업들의 대북 경협을 밀어주기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모색해왔다. 올해도 남북교역을 비롯해 개성·금강산 사업, 남북한 육로 연결의 3대 경협사업이 꾸준히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남북협력기금의 정부 출연금이 2004년 1714억원에서 2005년에 5000억으로 늘어난 것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러나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 등 전략적으로 우선 투자해야 할 분야를 외면할 수 없고, 북핵 문제로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는 한계 때문에 기업인들의 볼멘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도 불신 숨기지 않아

지난해 7월 이후의 남북 관계 경색, 이어 올 2월10일 북한 핵 보유 선언 등이 연거푸 터져나오면서 민간 기업인들의 대북사업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7월 이후 남쪽 기업인들의 방북을 막으면서 8개월째 경협사업의 표류를 지켜만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기존 사업의 유지마저 힘겨워하고, 신규 사업의 추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자제품 조립 공장을 합작으로 꾸려오던 기업인은 “고위 경영진들이 북한 사업이 갖는 불확실성과 돌발 변수에 점차 지쳐가고 있다”면서 “기존 생산라인은 당분간 유지할 예정이나 당초 계획했던 신규 사업의 추진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평양에서 컴퓨터 조립생산 공장을 운영해왔던 다른 기업인도 “원래 사업이라는 것이 현장을 자주 방문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협의를 해야 서로의 문제점들을 신속히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다. 현장 방문 중단은 이런 문제점 해결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자제품 부품 관련 임가공 생산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왔던 한 대기업도 북쪽 파트너와의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하자 최근 사업 중단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면 중국 베이징 등 제3국에서라도 활발한 사업 협의를 벌였으나 최근에는 이마저도 띄엄띄엄 이뤄지는 바람에 자신감 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4년 초까지만 해도 일반 경협사업으로서 삼성전자의 임가공 사업 및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 KT&G의 담배 임가공 사업, 평화자동차의 자동차 조립생산, 국제옥수수재단의 농업기술 협력사업 등 바야흐로 본격적 경협과 관련한 사업 출장성 방북이 줄을 이었다. 또 성신산업의 철도화차 제작기술 지원, 제일모직, LG 등의 의류 임가공 사업 및 물자교역 등 남북경협과 관련한 방북이 꾸준히 이뤄졌다.

결국 지금 경협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이라는 쌍두마차가 간신히 이끌고 가는 셈이 됐다. 그래도 다른 사업들에 견줘 지속성과 안정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남북한 당국의 직·간접적인 ‘사업보증’이 이런 순항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북한 관계자들도 대북 투자 사업 협의를 벌이면서 가장 먼저 남한 당국의 지원 여부를 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은 북쪽 인사들도 경협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심하게는 “더는 남쪽 기업과의 사업에 기대를 걸지 않겠다”는 목소리도 새어나온다. 북한 기업들은 중국 대륙으로 고개를 돌려 본격적인 경협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지난해 중국과의 무역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반면 한국, 일본과의 무역은 줄어 중국 의존도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북-중 무역규모는 13억8521억달러로 이전 해에 비해 35.4%나 늘었다.

정부 “현 상황 안정적 관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 대화와 북핵 6자회담 등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개성공단 개발 등 남북협력 사업들은 예정대로 진행해 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가겠다고 강조한다. 남북한이 개성공단 개발을 통해 경제협력과 민족화해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지만 이는 한-미 관계에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회 일각의 보수적 목소리를 의식한 발언으로 비친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 대사는 2월18일 남북경협에 대해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이니셔티브나 접근법을 조율하는 것”이라며 “한-미간에는 조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속도 조절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정부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개성공단에는 3월 중에 전력을 공급하고, 1단계 5만평에 대한 분양도 예정대로 추진할 방침이다. 또 전략물자 반출 등 개성공단 사업 추진을 위한 한-미간 협의는 그간 해온 대로 이어나가면 된다는 입장이다. 다만 북핵 상황이 더 나빠진 뒤에도 개성공단 사업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남북경협은 북한과의 신뢰를 잇는 끈일 뿐 아니라 안보 불안감을 크게 줄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다. 더구나 섣불리 남북경협에서 손을 떼면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남쪽의 영향력은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이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북핵 문제와 남북경협을 연계시키면 지난 94년 1차 북핵 위기를 맞은 김영삼 정권이 ‘핵을 가진 자와 손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북핵 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결국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분담금만 물게 된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타당한 지적으로 비친다.

더구나 북한이 6자회담에 참가하고, 핵 문제가 전향적으로 풀릴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이럴 경우 경협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그 폭도 크게 넓어질 게 뻔한 상황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폐막 연설에서 “북한이 핵 포기 과정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의미하는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대북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남북협력기금 확충 필요

경협은 속성상 접었다 다시 펼 경우 신뢰를 크게 손상시킬 뿐 아니라 막대한 금전적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동영 장관도 2월22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북핵 문제로) 남북경협이 직·간접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일희일비식이 아닌 일관성 유지가 필요하다”며 기존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처럼 당국 차원의 경협에 기대는 것은 국내외의 정치적 바람에 꺾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스럽게 비치기도 한다. 따라서 순수 민간 차원의 대북 투자 사업의 물꼬를 틔워주는 대안 마련도 시급해 보인다. 외풍을 타지 않는 다양한 소규모 경협 프로젝트의 동시 추진이 필요한 셈이다. 정부 관계자도 “지난 10여년간의 남북 관계를 돌이켜보면 결국 개별 기업이 자기는 망하면서도 대북 투자라는 지렛대를 통해 남북 당국간 대화의 지속이나 군사적 긴장 완화에 기여한 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면서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정부가 정치적 부담이 덜한 일반 기업들의 대북 진출을 지원하는 데 더욱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기업인도 “개성공단 사업의 중요성을 잘 안다”며 “개성공단이 살기 위해서도 다른 지역의 경협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남북협력기금 2천억원을 10억원 규모의 200개 경협 프로젝트를 만들어 북한 전역에서 추진한다면 남북 관계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홍순직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향후 경협의 실제적 제도화와 남북협력기금의 확충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통일세와 통일복권의 신설, 사모펀드 조성이나 일정 규모에 한해 자금 출처를 면제해주는 중장기 국공채 발행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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