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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파 사건 재조사된다

등록 2004-11-05 00:00 수정 2020-05-03 04:23

국정원 과거사 조사에 참여한 민간위원들이 제안…면죄부만 줄 가능성 크다는 지적도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관련 의문사 중 최대 의혹 사건으로 꼽히는 ‘KAL 858기 폭파 사건’이 17년 만에 재조사될 전망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천주교 인권위 등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발전위원회)에 참여한 인권·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최근 모임을 갖고 KAL기 폭파 사건을 조사 대상에 포함할 것을 발전위원회에 공식 제안하기로 했다. 발전위원회가 조사할 사건은 15명의 위원들이 선정하게 되는데, 이 중 인권·시민단체와 학계를 대표한 민간위원이 10명이나 되기 때문에 KAL기 폭파 사건 재조사는 쉽게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도 과거사 진상 조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발전위원회에 넘긴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다.

의혹 풀 단서 거의 없어

발전위원회의 한 민간위원은 “KAL기 사건은 국정원 과거사 청산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국정원이) 이를 거부한다면, 민간위원들이 발전위원회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발전위원회는 11월2일 첫 공식 모임을 갖고 조사 대상 사건에 대해 논의를 시작한다. KAL기 사건 외에 유력하게 거론되는 사건은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 최종길 교수·장준하 선생 의문사 등이다.

KAL 858기 폭파 사건은 115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임에도 아직까지 희생자의 주검이나 유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폭파범 김현희에 대한 안기부의 일부 수사 결과가 실제와 달라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이 1987년 대선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에 발생했기 때문에 ‘정치 공작’의 의혹도 강하게 제기됐다. 실제로 김현희를 대선 바로 전날에 서울로 압송한 것을 두고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격렬한 정치적 논쟁이 붙었다. 김현희 압송 장면이 텔레비전에 생중계된 것이 시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해 여당 후보인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당선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이 명쾌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김현희의 진술 말고는 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안기부의 수사가 김현희의 진술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결과다. 안기부는 김현희가 특별사면을 받은 직후 발간한 수기 내용과 수사 결과의 일부가 차이가 나자 이를 번복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또 항공기 폭파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할 기체 잔해도 제대로 확보돼 있지 않다. 현재 국정원에는 사고기에 탑재됐던 것으로 보이는 구명보트 외에는 사고 원인을 규명할 만한 잔해가 없다. 그나마 수거된 잔해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안기부는 지난 1990년 KAL 858기의 것으로 보이는 기체 잔해를 버마 안다만 해역에서 발견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이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이 잔해는 폐기 처분됐다. 그동안 국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언론에 관련 자료를 조금씩 공개했으나, 유족들이나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제기한 의혹을 풀기에는 미흡했다.

국정원은 발전위원회의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KAL기 폭파 사건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관계자는 “발전위원회의 위원을 2(민간위원) 대 1(국정원)의 비율로 선정한 것이 국정원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정원은 KAL기 사건과 관련된 의혹에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국정원의 또 다른 관계자는 “지난해 말 KAL기 사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을 때 국정원 고위 간부들이 이 사건을 전면적으로 스크린한 적이 있다”며 “그 결과 별다른 의혹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 유족들의 재조사 요구를 수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밝혔다.

발전위원회, 큰 틀에서 접근해야

이 때문에 KAL기 사건에 대한 발전위원회의 재조사가 국정원에 면죄부만 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원의 자료가 ‘부실’한데다, 사건이 발생한 지 17년이 지나 새로운 자료 확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동안 유족들의 줄기찬 재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던 국정원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배경이 의심스럽다”며 “KAL기 사건이 진상 규명 대상에 포함될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도 국정원이 자발적으로 과거사 규명 작업에 나선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발전위원회의 민간위원들도 이런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발전위원회에서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해서 이를 의혹이 없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안병욱 교수(가톨릭대)는 “발전위원회의 민간위원들은 국정원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며 “발전위원회의 성과 여부는 전적으로 국정원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발전위원회는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과거사 기본법)이 제정되더라도 자체 과거사 청산 작업을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과거사 기본법에 따라 출범한 진상 규명 기구에서 같은 사건을 다룰 경우,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 제출 요구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한편, 발전위원회가 성과를 거두려면 개별 사건에만 집착하지 말고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안병욱 교수는 “우리 정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가 70, 80년대 만연했던 정보기관을 이용한 공작 정치”라며 “발전위원회가 공작 정치의 실상을 일부나마 파헤칠 수 있다면 우리 정치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믿을까 말까 국정원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 규명 작업을 바라보는 인권·시민단체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과연 국정원의 의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8월 고영구 국정원장의 제안을 받았던 인권·시민단체들은 참여 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논쟁을 벌였다.
쟁점은 고 원장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국정원 전체의 의지로 볼 수 있느냐는 것. 고 원장이 국정원 수장임에도 국정원의 조직 특성상 원장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점이 인권단체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결국 ‘고 원장을 믿고 참여하자’는 쪽과 ‘거부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렸는데, 처음 제안을 받았던 단체 중 참여연대는 불참을 결정했다.
국정원은 과거사 청산에 대한 ‘강하고 순수한 의지’를 믿어달라고 강변한다. 국정원 관계자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업보’를 털어내지 못하면 국정원의 미래는 없다는 정서가 강하다”며 “이런 정서는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 만연돼 있다”고 밝혔다. DJ 정권 출범 이후 입사한 직원들은 선배들의 업보를 더 이상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공작 정치에 개입했던 직원들이 현재 국정원 내부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점도 이런 정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KAL기 폭파 사건의 경우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 중 현직에 남아 있는 직원은 단 한명뿐이다. 국정원 내부에는 이미 퇴직한 사람들 때문에 새로 입사한 직원들까지 계속 ‘오명’을 뒤집어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직원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정서에도 국정원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특히 발전위원회에 참여한 단체들은 국정원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발전위원회 관계자는 “고 원장을 믿고 참가를 결정했지만, 국정원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언제든지 박차고 나올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번 국정원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내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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