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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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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타격 권노갑!

등록 2000-12-12 00:00 수정 2020-05-02 04:21

민주당 당내쇄신론의 표적으로 떠오른 권력실세 2인자, 왜 그가 문제인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아침이면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3층 회의실 주변은 유난히 북적거린다. 정례 최고위원회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권노갑 최고위원을 만나 각종 민원과 인사청탁을 하러 온 이들도 10∼20명씩 있다. 이들은 권 최고위원이 회의실을 나서면 너도나도 몰려들어 잠깐 시간을 내줄 것을 간청한다. 권 최고위원이 회의를 마친 뒤 당사 8층 최고위원실에 올라가는 날에는 권 최고위원의 방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김옥두 사무총장은 “오랫동안 야당생활을 하며 민주화에 공헌했지만 정권교체 이후에도 직장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해 어렵게 사는 분들이 많다. 권 최고위원이 이들의 하소연을 듣고 도와줄 일은 도와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는 권노갑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던 막강 파워 권 최고위원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공격의 선봉에는 정동영 최고위원이 섰다. 12월2일 정 최고위원이 청와대 최고위원 만찬에서 “권노갑 최고위원은 결백하나 온갖 소문이 나돌고 있다. 권 최고위원이 임무를 받아 과거 고생했던 사람들을 무마한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국민 눈에 마치 YS정권 때 김현철처럼 보이고 있다”며 권 최고위원의 2선후퇴를 주장하면서 민주당은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재정, 김태홍 의원 등 초선의원 12명도 특보단을 통해 청와대에 권 최고위원의 2선후퇴 등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검찰총장과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파동 이후 집권여당의 무력감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당정쇄신론이 사실상 여권 내 최대실세인 동교동계 좌장 권 최고위원의 목을 겨누는 화살로 돌아온 것이었다.

공기업 인사는 ‘권’으로 통한다?

권 최고위원쪽이 ‘음모론’으로 격렬하게 맞받아치며 당내 분란으로 확산된 이번 사태는 12월7일 청와대의 적극적인 진화로 일단 진정국면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아무도 완전한 봉합이 이뤄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권 내 최고 실세라는 권 최고위원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사실 권 최고위원이 권력서열 2인자라는 사실은 여권 내에서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권 최고위원은 1963년 김대중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뒤 40년 가까이 김 대통령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좌해왔다. 정권교체 뒤에는 여권 내 최대 파워그룹으로 떠오른 동교동계의 맏형으로서 여권의 실질적인 중심역할을 해왔다. ‘정부산하단체 임원과 당내 인사는 권 최고위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여권 내에서 정설로 통하게 된 것은 권 최고위원의 이런 막강 파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권 최고위원은 각종 인사청탁과 관련 무성한 소문들로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됐다. 실제 당 안팎에서는 권 최고의 인사개입과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지난 4·13총선 전의 일이다. 모시는 의원님 심부름으로 당시 고문이었던 권 최고위원 사무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국민의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던 인사가 대기실에서 권 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인사는 전국구 공천을 받기 위해 뛴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주위에 물어보니 오전에 와서 7시간째 권 고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 정말 권 최고위원이 세기는 센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민주당 중진의원 보좌관) “주위 사람들에게 ‘정부산하단체나 공기업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권 최고위원을 만나 상의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권 최고위원을 어렵게 만났다. 그랬더니 며칠 뒤 한 국영기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정부 관할부처에서도 연락이 오고. 그래서 이리로 오게 됐다. 정부산하단체와 공기업 임원 인사는 권 최고위원으로 창구가 단일화돼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민주당 당료 출신 한 공기업 임원) “같은 동교동계 식구지만 권 최고위원이 거부하는 한 한화갑 최고위원의 힘으로는 한 사람도 공기업에 들여보내지 못한다. 며칠 전 한 최고위원쪽 두명이 공기업에 진출했는데 그때도 권 최고위원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한화갑 최고위원쪽 관계자)

“당내 언론의 동맥경화를 불렀다”

권 최고위원이 정부산하단체나 공기업 임원 인사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된 계기는 지난 4월 총선을 전후한 시기라는 게 여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당시 총선을 앞두고 화두는 ‘물갈이론’이었다. 그렇지만 낙천대상자들의 반발 때문에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어났다. 공천후유증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권 최고위원에게 이들을 다독거리는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당시 총선불출마를 선언한 권 최고위원이 적격이었다. 권 최고위원이 이들을 주저앉히는 대신 정부산하단체 임원 자리를 주선해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인사에 본격 개입하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권 최고위원은 4·13총선에 불출마한 전 의원들로 구성된 ‘일오회’의 고문을 맡아 이들의 공기업 진출을 적극 뒷받침했다. 이에 따라 조홍규 관광공사 사장, 채영석 고속철도공단 이사장, 김명규 가스공사 사장 등 일오회 회원들이 대거 공기업에 진출했다. 이 밖에도 유인학 조폐공사 사장, 박문수 광업진흥공사 사장, 나병선 석유공사 사장 등 이른바 낙하산 인사의 대부분이 권 최고위원의 배려로 정부산하단체나 공기업의 임원이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권 최고위원쪽에서도 정부산하단체나 공기업 인사에 관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권 최고위원의 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권 최고위원의 인사개입을 너무 과장해볼 필요 없다. 권 최고위원이 개각 등 장관인사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과거 민주화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어려움이 있으면 권 최고위원에게 하소연한다. 청와대에도 다 보고해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내 문제와 관련해서도 권 최고위원이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는 게 당내 비판세력의 주장이다. “당인사나 당론 결집과정이 투명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권 최고위원과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 의해 독단적으로 밀실에서 처리된다. 이에 따라 당내 언로의 동맥경화증이 심각하다. 또 참신하고 합리적인 사람보다 말 잘 듣고 충성심이 앞서는 사람이 주요 포스트에 포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 제대로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총무경선에서 정균환이 압승한 이유

사실 권 최고위원은 당과 청와대 등 여권핵심부의 공식 지휘계통에 서 있지는 않다. 당 총재의 협의기구 구성원에 불과한 최고위원의 직함으로는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극히 제한돼 있다. 구조적으로 투명한 공식 시스템에 의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권 최고위원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에서는 김옥두 총장, 청와대에서는 한광옥 실장과 남궁진 정무수석 등을 손발로 활용하고 있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따라서 권 최고위원의 문제는 곧 권 최고위원을 정점으로 하는 동교동계 주류의 문제로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8월 전당대회를 전후한 시기에 당직개편론이 거세게 일고 11월 검찰총장과 대검차장 탄핵소추안 파동 이후 당정쇄신론이 휘몰아칠 때 권 최고위원이 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지난 5월 원내총무 경선과 관련한 민주당 관계자의 말은 밀실정치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총무경선에는 정균환 현 총무와 임채정, 이상수, 장영달 의원 등이 나섰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정 총무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사실 권 최고위원을 비롯한 동교동계에서는 이미 정균환 총무를 낙점한 상태였다. 애초 권 최고위원쪽은 정 총무와 함께 다른 두 중진의원을 총무후보로 꼽고 선정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한광옥 실장은 직접 이들 셋과 만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조정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미리 결정된 상황에서 총무를 뽑는 의총은 사실상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 아니겠느냐.”

대신 의원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철저한 단속과 길들이기로 대응했다. 이 일은 주로 당내 살림을 맡고 있는 김옥두 사무총장이 맡았다. 김 총장은 9월 초·재선의원 13명이 지도부 개편을 주장하고 나선 이른바 ‘금요일의 반란’ 당시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해당의원들에게 전화를 걸고 직접 방문까지 하며 사전 단속에 나섰다. 또 박상규, 천용택 의원 등이 당외 연구소인 ‘새시대전략연구소’ 설립에 나서자 주도의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내 분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적극 제동을 걸기도 했다. 특히 5월4일에는 당내 소장파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당내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자 권 최고위원(당시 상임고문)이 직접 30대 총선출마자 25명을 불러 모아 “정체성을 가지고 개혁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일방적 목소리는 안 된다. 당 조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조화와 협력 속에서 일해야 한다.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당을 위해 봉사하고 당을 중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직접 386당선자 길들이기에 나서기도 했다.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소속의원들을 함께 당을 이끌어가는 동료로 보기보다는 단속과 길들이기 대상으로 보는 이들이 당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내 민주화는 말해 무엇 하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DJ는 권노갑에게 전권을 맡겼나

그러면 권 최고위원의 이런 정치행태를 김대중 대통령은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권 최고위원은 김 대통령의 지시가 없거나 적어도 김 대통령의 용인이 없는 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게 김 대통령과 권 최고위원의 관계를 잘 아는 여권 관계자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다. 실제 민주당 중진의원이 전하는 말은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어떤 최고위원이 출신지역 사람의 인사문제 때문에 어렵게 김 대통령을 만났다. 그랬더니 김 대통령이 ‘그런 일이라면 권 최고위원과 상의해보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정부산하기관에 자리를 마련하는 문제는 권 최고위원에게 거의 전권을 맡겼다는 뜻으로 해석될 만한 대목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동교동계의 한 의원은 “4월 총선을 앞두고 공천후유증이 일어나지 않게 낙천대상자들을 잘 무마하고 과거 민주화과정에서 고생한 사람들을 돌봐주라는 것은 김 대통령의 뜻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이 작업은 이제 대충 끝난 상태다. 따라서 이제 김 대통령이 권 최고위원의 역할을 바꿔줄 적당한 시기를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2선후퇴론이 터져나와 오히려 자연스러운 역할변경이 더 어렵게 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최근 당정쇄신론을 타고 불거진 이른바 ‘권노갑 문제‘는 다름아닌 ‘김대중 문제’이기도 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교동계 사정에 밝은 민주당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 정치풍토에서는 어떤 정치인에게도 정치자금 조달 등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김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야당 시절 혹독한 탄압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그동안 이처럼 그늘진 부분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등 악역을 떠맡은 것이 권 최고위원이었다. 이번 권 최고위원 사태도 일정부분 그런 측면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 최고위원의 정치행태에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민주당의 중진의원은 이 대목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권 최고위원은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 그래서 누구든 찾아오는 사람을 내치지 못하고 다 만나준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더욱이 인사개입이나 당무 전횡 같은 일을 권 최고위원이 즐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일종의 과시욕 같은 것이라고 할까,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것 같다. 모든 인사는 권 최고위원으로 통한다는 식으로 부풀려지는 것을 스스로 즐기면서 비난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어느 호텔 중식당에서 일어난 일

권 최고위원의 평소 행동도 구태 정치인의 이미지를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권 최고위원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애용하는 호텔 등의 공개된 장소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한 무역회사 부장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지난 7월 어느 날 은행들의 파업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할 때의 일이다. 호텔신라 중식당에서 홍콩 거래처 관계자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옆자리가 왁자지껄했다. 도대체 이런 공공장소에서 누가 저렇게 예의없이 떠들어대는가 싶어 봤더니만 TV를 통해 낯익은 권노갑씨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함께 있던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형님, 형님…’ 하며 떠받드는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뿌려졌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구경도 하기 힘든 발렌타인 30년산이 여러 병 보였다. 나도 지난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찍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 ‘내가 이런 꼴 보려고 DJ를 찍었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박병수 기자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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