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나라’만 트집잡는 유엔 인권위의 국가별 결의안… 북한인권 결의안 채택 ‘정당성 공방’
제네바= 이성훈 전문위원 leesh@iprolink.ch
4월15일 오후(현지 시각) 제네바에서 열린 제60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이 찬성 29, 반대 8, 기권 16으로 채택됐다.
올해의 결의안(E/CN.4/2004/L21)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유럽연합(EU)이 주도했다. 지난해보다 찬성이 1표, 기권이 2표 늘어난 반면 반대는 2표가 줄어들었다. 지난해의 결의안은 한국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28, 반대 10, 기권 14로 채택됐다. 올해 한국 정부는 이미 언론에 보도된 대로 기권표를 던졌으며 표결 결과는 작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의안 내용은 훨씬 정치적 강도가 높아졌다.
‘특별보고관제’등 지난해보다 강력
올해 결의안에는 기존의 고문, 정치범 수용소, 공개처형, 강제노동의 인권문제 외 인신매매와 강제낙태에 의한 영아살해 등 새로운 내용이 추가됐다. 결의안은 이행 수단으로 기존의 식량권, 고문, 자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 분과의 구성 외 북한을 전담하는 국가별 특별보고관의 임명이 새롭게 포함됐다. 국가별 특별보고관 임명은 보통 특정 국가에 대해 유엔 인권위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조처로 올해 결의안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결의안에 따라 새롭게 임명되는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은 다음해 유엔 인권위뿐만 아니라 올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도 보고하도록 돼 있다.
유럽연합의 의장국으로 결의안을 제출한 아일랜드의 외교관은 “북한이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유럽연합의 기대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이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꾸어 결의안을 인정하고 이의 이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한 유럽연합은 정치적 압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주제네바 북한대표부의 외교관은 “북조선 정부는 지난해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위원회의 인권보고서 심의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현재 아동권리위원회의 두 위원이 북한의 아동인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물고 있다”며 “유럽연합의 결의안은 북조선의 인권 개선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북한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결의안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올해 결의안 논의 과정 가운데 북한은 미리 준비한 연설에서 결의안이 “미국이 이라크 침략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해낸 모략 문건”과 같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기에 “단호히 전면 배격한다”고 기존의 입장을 재천명했다. 북한은 유럽연합이 “미국의 비합법적인 이라크 침공과 강점, 민간인 대량 살륙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는 문제시하지 않고 이와 관련된 상정은커녕 우려의 표시 한마디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유럽연합의 “정치화, 선택성 및 이중기준”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다.
관점 또는 기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이런 상반된 입장은 표결 전 토론에서 대리전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럽연합과 함께 결의안을 공동 제출한 미국은 북한을 “가장 억압적 정권”이라고 강하게 비난했고, 일본은 “납치자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 투명한 해결”을 촉구했다. 한편 쿠바는 대북 결의안이 “대화가 아닌 대결을 조장”하는 “이중적 잣대”의 전형이라고 비판했고, 중국은 “자연재난으로 경제난에 처한 북한을 더욱 고립시키는 조처”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내용 없는 대화’보다는 ‘정치적 압력’을 선호하는 서방국가와 ‘정치적 압력 없는 대화’를 원하는 북한의 줄다리기가 각각의 동맹국을 통해 확대되어 재생산된 셈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이제 북한 인권 문제는 유엔 인권위의 주요 의제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 일본의 유엔을 통한 대북 정치적 압력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결의안에 따른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 제도가 북한 인권 개선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할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현재 북한의 입장을 보면 유럽연합의 기대와 주장대로 더 강한 정치적 압력을 통해 북한을 유엔과 더 적극적인 협력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인권 분야에서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고립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체제 위협’ 결의안 간주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 북한 인권을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북한이 지난해의 결의안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올해 나라별 특별보고관까지 임명됨으로써 이제 북한과의 공식 대화가 더욱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올해에도 기술협력 프로그램이 결의안에 명시적으로 포함됨으로써 인권고등판무관실이 결의안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북한의 인권 개선 노력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이 당분간 막혔다”며 결의안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당일 오후 유엔 인권위에는 북한 말고도 여러 나라의 결의안이 상정됐다. 이 가운데 짐바브웨, 체첸, 중국 결의안을 부결시켰고 벨로루시, 투르크메니스탄, 나머지 국가들의 결의안은 통과시켰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제네바의 국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는 “올해에도 강대국은 피하고 힘없는 작은 나라는 당하는 악습이 되풀이됐다”며 국가별 결의안의 ‘정치적 남용’의 우려를 표명했다. 사실 이러한 인권위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난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그리고 올해 미국이 2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중국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미국은 지지난해 결의안을 제출할 자격을 지닌 인권위 위원국이 아니어서, 지난해에는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중국의 ‘묵인’이 필요한 정치적 고려에서 결의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 인권위에서 북한 인권결의안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별 결의안이 실제 인권 상황의 심각성보다는 서방국가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의 공감대가 ‘인권 후진국’으로 낙인찍힌 비서구 국가뿐만 아니라 국제 인권 NGO들 사이에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별 결의안의 정치적 남용을 방지 또는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그 실효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논의가 유엔 인권위 안팎에서 최근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당분간 유럽연합과 북한간의 인권을 둘러싼 강경한 입장이 대립되면서 ‘냉전’이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이러한 냉전은 인권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권에 ‘익숙한’ 서방국가들은 ‘인권을 인권의 문제로’ 다루지만 북한은 인권을 ‘정치 체제’와 연관해서 다루어왔다. 북한이 올해 지난해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 중심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강도 높게 반발한 것은 연이어 계속되는 결의안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북한의 한 외교관은 “지난해 유럽연합의 유엔 인권위 결의안 상정 결정이 북한의 핵확산금지협정(NPT) 탈퇴를 계기로 이루어졌다”라고 주장하면서 “유럽연합은 인권을 구실로 한반도 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하려고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북한이 인권 문제를 독립변수가 아니라 체제안보의 종속변수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북핵 관련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올해 말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결의안에 대한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엔의 북한 인권 개선 시도가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중재자’로서 한국 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표결 직전 “2000년 6월의 남북 정상회의 이후의 화해협력 분위기”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시대”라는 상황에서 “남북 관계의 특수한 사정을 포함한 제반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기권한다”고 기권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이어 “기권이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방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북한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효과적이고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사례로 “이산가족 상봉”과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사업”을 언급했다.
한국정부는 왜 당당하지 못한가
하지만 한국 정부는 올해 결의안 논의과정에서 수동적 자세에 머물렀다. 한 인권 활동가는 “한국 정부는 유엔 인권위에서의 북한 인권 문제를 여전히 찬성, 반대, 기권 또는 불참의 네 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이제는 남이 출제한 문제의 모범답안을 찾는 학생의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는 교수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그러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한국 정부의 인권외교 역량과 관성을 볼 때 이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지난 10년간 절차적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엔이 설정한 국제인권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한국의 인권 현실은 한국 정부가 더 당당히 국제사회에서 인권외교를 펼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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