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민심에 ‘탄핵심판’ 더 부담스러워진 헌법재판소, 정치권 해결 은근히 바라는 분위기
석진환 기자/ 한겨레 사회부 soulfat@hani.co.kr
17대 총선이 여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국민들의 눈길이 자연스레 헌법재판소를 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실상 ‘정치적 재신임’에 성공한 것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헌재의 겉모습은 바깥 세상의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기만 하다. 헌재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정치적 고려를 했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총선 다음날인 지난 4월16일 윤영철 헌재소장은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법 절차에 따라 심리한다”며 “원칙에 따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심리할 뿐, 정치적인 부분은 모른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정치적 해석과 추측에서 비롯되는 오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원론적인 얘기를 꺼낸 것이다.
헌재는 호수 위의 백조?
그러나 탄핵을 반대하는 여론이 총선을 통해 거듭 확인된 만큼 헌재로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은 언론이나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한 채 내부적으로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일부 재판관들은 언론과 시민단체의 조속한 결정 촉구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헌재 연구관을 지낸 한 변호사는 “재판에 필요한 최소한의 절차가 있는데도, 신속한 결정을 바라는 지금의 여론에는 그런 과정에 대한 고려가 없어 아쉽다”고 헌재의 고민을 뒷받침했다.
법조계에서는 요즘의 헌재를 호수 위를 떠가는 우아한 ‘백조’에 비유한다.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움직이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로 바쁜 물갈퀴질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헌재는 최도술·안희정씨에 대한 증인 신문을 4월20일에, 여택수·신동인(롯데쇼핑 사장)씨에 대한 증인 신문을 23일에 연다. 재판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문병욱 썬앤문그룹 회장과 김성래 부회장, 홍성근 전 국세청 과장, ‘열린우리당 총선 대응 문건’을 보도한 강민석 기자 등 5명에 대해서는 일단 증인 채택을 보류했다. “심판 진행 상황을 봐가며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헌재가 보류한 다른 증인들을 채택할 가능성은 낮다. 심리 일정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증인 신문이 끝나고 다른 절차를 밟지 않고 곧바로 일주일 뒤에 결심을 연다고 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5월 중순에나 나올 가능성이 높다. 헌재가 공개변론을 1~2차례 더 잡게 되면, 최종 결정은 5월 말이나 6월 초까지 넘어가게 된다. 헌재는 내심 시간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다. 헌재의 한 관계자는 “심리가 5월로 접어들게 되면 시간에 대한 부담감은 총선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측근비리, 특검에서도 못 밝혔는데…
헌재는 지난 9일 열린 3차 공판에서 대통령 측근비리와 관련한 증인과 증거를 대거 채택했다. 헌재는 이미 증인 4명에 대한 소환장을 보내는 한편, 1만7천여장에 이르는 측근들의 재판기록을 복사해 분석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측근비리가 탄핵 심판의 최대 쟁점이 되는 게 아니냐” “재판부가 예상보다 깊고 까다롭게 심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이같은 증거 채택에 대한 다른 시각이 있다. 노 대통령 대리인단의 문재인 변호사는 “이미 법정에 섰던 증인들을 다시 부르는 게 섭섭하긴 하지만, 결정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할 최소한의 절차로 본다”며 헌재의 증거 조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각각의 사유를 한번은 살펴야 하는 ‘통과의례’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양쪽의 주장 가운데 재판부가 어떤 한쪽의 주장에 마음을 두고 있을 경우, 그 반대편이 요청하는 증거나 증인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헌재 연구부장 출신의 한 인사는 “측근비리의 경우 결국 ‘노 대통령의 공모 여부’를 밝혀내는 게 핵심인데, 검찰에서 오랜 기간 동안 수사를 벌이고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을 재판에서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새로운 사실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전망했다. “검찰과 특검, 법원을 거치면서 언론에 알려졌던 내용이 헌재의 증인 신문 때도 앵무새처럼 똑같이 반복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진단이다.
한편, 헌재의 내부 고민과는 별도로 총선 뒤 정치권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탄핵 철회 합의’ 논의가 이번 탄핵 심판의 새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총선 다음날인 16일 “탄핵안은 16대 국회의 정치적 산물이고, 법률 문제 이전에 정치적 문제”라며 “16대 국회가 결자해지 해야 하고, 헌법재판소도 그러길 바랄 것”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에 앞서 원내3당이 된 민주노동당도 “탄핵 문제는 실정법이나 절차상의 문제를 떠나 정치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3당 대표가 합의하고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 진지하게 사과한다면 탄핵 철회가 가능하다”고 탄핵 철회 논의에 불을 지폈다.
노 대통령 대리인단의 문재인 변호사도 “국회의 일반 정족수(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면 철회가 가능하다는 게 헌법학계의 다수 의견”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재판이 진행 중인데,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철회론’ 자체를 차단하고 나섰지만, 박 대표의 측근으로 떠오르고 있는 윤여준 의원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면 야당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며 철회론의 불씨를 남겨둔 상태다. 총선을 통해 재신임을 받은 만큼 대통령이 국민에게 진지하게 사과하면 야당도 물러설 명분이 생기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 앞에 정치권이 내놓는 첫 결과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헌법 재판관들도 철회 반길 것”
현재 여·야의 합의가 이뤄지는 방식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국회를 소집해 탄핵소추안 자체를 철회하는 방안이 있고, 여·야가 탄핵안을 철회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합의만 이뤄놓으면 헌재도 부담 없이 기각 결정을 내리지 않겠냐는 예측이다.
헌법재판관들의 생각은 어떨까? 탄핵 심판의 주심인 주선회 재판관은 “미리 가정해서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그때 가서 생각해볼 문제”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헌재의 한 관계자는 “국회의 탄핵 철회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로 헌재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합의만 이루고 철회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부담스럽겠지만, 국민의 뜻이 결국 ‘새정치’를 하라는 것 아니냐”며 ‘결자해지’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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