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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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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죽음보다 더한 공포

등록 2001-06-27 00:00 수정 2020-05-02 04:21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어느 피해여성의 사연… 연이은 협박과 폭행에 영혼까지 파괴당해



싫다는데도 의도를 가지고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스토킹. 당하는 사람에게는 24시간 계속되는 정신적 고문이다. 스토킹의 어두운 그림자는 일반인이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최근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연합 등 3개 여성단체에서 합동성명서를 냈다. 짝사랑하는 여성을 쫓아다니면서 강제로 성추행한 스토커에게 벌금 1천만원을 선고한 사법부의 판결과 여학생의 휴대전화에 상습적으로 폭언을 남기고 폭행과 협박을 일삼은 스토킹가해자에 대한 검찰의 구속기소조치를 환영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물론 성폭력특별법과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특별법 등 다른 법률을 적용받았다. 하지만 스토킹 피해를 사법부와 검찰이 인정한 것은 일반인이 스토킹을 사회범죄로 인식하는 데 큰 몫을 한다고 여성계는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에서 스토킹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자신과 주변에서 피해경험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크고, 스토킹을 일반적인 구애의 한 형태로 여기는 시선도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한 피해자의 육성을 통해 스토킹의 사회범죄적 특성과 진행과정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스토킹의 실태와 가해자의 심리, 시급한 법적·제도적 장치와 피해대처방법을 알아본다.

편집자


한 여자가 떨고 있다.

그는 1년 넘도록 자신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던 한 남자를 상습적인 협박과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이를 받아들여 지난 6월11일 남자를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남자는 8일 뒤 보석석방됐고, 여자는 남자가 어떤 식으로 보복을 가할지 두려워 밤잠을 설치고 있다.

여자는 “차라리 내가 칼로 찔렸더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 혼자 못죽어, 죽여버리겠어”

서울의 한 대학 야간학부에 다니는 이지숙(가명·32)씨가 박민형(가명·26)씨를 만난 것은 지난해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줄곧 직장생활을 해왔던 이씨는 99년 회계사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다. 이씨는 지난해 3월 수강신청을 할 때 우연히 박씨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뒤로 만나면 서로 인사했고 몇 차례 학생들과 어울려 밥을 먹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초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있던 이씨는 차에 시동을 걸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박씨를 보고 정문까지 태워다줬다. 박씨는 내리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씨가 박씨에게 빨리 내리라고 하자 박씨는 차문을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고 떠났다. 이씨는 아주 제멋대로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박씨의 이상한 행동이 시작됐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굴었다.

길거리에서 지나치면 “왜 아는 척하지 않느냐”고 따졌고, 커피를 마시거나 단둘이 점심을 먹자고 졸랐다. 이씨는 신경이 쓰여서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찾지 말라”고 거절의사를 몇번 밝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9월 중순께, 박씨는 본격적으로 이씨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도서관 열람실로 찾아와 몸을 쿡쿡 찌르며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요구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이 행위는 반복됐다. 정작 밖에 나가면 멍하니 쳐다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지금은 그때의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만 당시 이씨는 그의 행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귀찮고 화가 났지만 어린 친구의 철없는 행동으로 여기고 피하기만 했다.

그러다 이씨는 10월 초부터 본격적인 협박에 시달렸다. 며칠 만에 도서관에 온 이씨에게 박씨가 휴지를 집어던지고 돌아갔다. “인생 그 따위로 살아? 사람을 무시해? 내가 너 죽여준다. 닭 모가지 비틀어서…”라는 협박이 갖은 욕설과 함께 적혀 있었다. 그날 저녁 휴대폰에는 20여통의 음성메시지가 녹음돼 있었다. 술에 취한 발음으로 “내 인생 끝났어, 나 혼자 못 죽어, 죽여버리겠어, 얼마나 잘난 놈 만나나 두고보자”는 등의 협박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다음날이면 또 도서관으로 찾아와 또 커피를 마시자며 쿡쿡 찔러댔다.

이씨는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는 한 학생에게 하소연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누나, 형이랑 싸웠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씨는 박씨가 자신과의 관계를 왜곡시켜 말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됐다. 박씨는 고집불통이긴 하지만 과묵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박씨는 점점 노골적으로 돼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어느 틈엔가 옆자리나 마주 보이는 곳에 앉아 이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씨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소리도 질러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박씨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날 피할 거면 옛날에 밥은 왜 사줬느냐”는 것. 이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나를 보면 먹이를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이 행위가 스토킹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참다 못해 박씨를 잘 아는 두 친구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부탁했다. 두 친구는 예전에 휴지에 적혀 있던 협박메시지를 본 적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게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며칠 뒤 박씨가 얼굴이 벌개져 누구에게 편지와 녹음내용을 들려줬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는 순간적으로 “대체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구느냐”고 소리쳤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씨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박씨는 그 뒤로 “메시지를 누구에게 들려줬냐, 우리 일을 누구에게 말했냐”고 물으며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학생들 보기도 민망하고 도저히 공부에 방해돼 “난 너처럼 한가한 입장이 아니니 제발 날 좀 놔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휴대폰 메시지녹음은 그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고 욕설을 퍼부은 뒤 “지금 나에게 전화해, 안 하면 죽어”라는 협박도 있었다. 나름대로 강단있는 성격이라는 말을 듣던 이씨였지만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분노는 어느 틈엔가 공포로 바뀌었다. 메시지를 들은 한 친구가 “미친 자식 아냐? 이거 고소하면 형사처벌감이야”라고 흥분하며 “내가 잘 이야기해볼 테니 걱정 말라”고 위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그 학생은 이씨쪽에서 요청한 참고인 진술도 거절했다. 많지 않은 여학생들은 직장생활을 병행하느라 이씨를 도울 형편이 못 됐다.

이씨는 점점 고립되었다. 사람들은 둘 사이의 남녀관계 문제로 왜 여러 사람 괴롭히냐고 힐난하는 듯했다. 또 그렇게 괴로우면서 왜 도서관에 나오느냐고 묻는 듯했다. 서른세살에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사람의 심정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공인회계사 시험은 석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점점 두려워졌다.

11월 중순께 이씨는 폭행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를 학교에 두고간 다음날, 차가 온통 찌그러져 있었다. 이씨 자신이 마치 두들겨맞은 듯했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하면 문제가 더 커질 것 같아 학교 행정실에 알렸다. 그리고 박씨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사이 박씨는 괴롭힘의 주제를 바꿨다. 이번에는 “휴대폰 메시지를 지워달라”는 것. 화장실 앞에서도 기다리고 있었고 하교길 어두운 차의 뒤편에 서 있기도 했다. 수업시간 직전에 교실로 들어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을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말하기도 민망해 자신이 겪는 피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씨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술 더 떠 이씨에게 “말이 안 통하는 애니 원하는 대로 해주면 조용하지 않겠느냐”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씨의 행동은 공무원시험에 떨어져 우울한 가운데 술주정을 부린 것쯤으로 이해됐다. 기가 막혔다. 사면초가에 빠진 심정이었다. 이씨는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오히려 지능적인 가해자

어느날 박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메시지만 지워주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애원했다. 눈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이씨는 마지막 남은 한 가닥 기대로 휴대폰에 남아 있던 메시지를 몽땅 지워줬다. 일부러 녹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메시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커다란 실수임을 이씨는 곧 깨달았다.

어느날 옛 직장에서 전화가 왔다. 한 남자가 이씨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자꾸 묻는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그 사이 요구사항을 또 바꾸며 이씨를 괴롭혔다. “날 후레자식으로 만들었으니 집에도 못 들어간다, 부모님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극심한 정신적 탈진상태에 빠진 이씨는 몸도 축나기 시작했다. 하나를 들어주면 다른 걸 요구하는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뭐든 꼬투리를 잡아서 자신을 옥죄는 끈을 놓지 않을 것 같았다. 물리적인 공포도 현실로 다가왔다. 박씨는 이씨를 점퍼로 후려치기도 하고 물병으로 내리치기도 했다.

12월 중순에는 중앙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섰던 박씨가 또 이씨를 잡아당겼다. 이씨는 박씨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대로는 억울해. 이렇게 끝낼 수 없어”라고 소리쳤다. 이씨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죽지 않는 한 박씨의 요구가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씨는 구역질이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한 학생의 등에 엎혀 보건실로 가는 사이 박씨에게 “아는 사이냐”고 묻자 박씨는 “잘 아는 사이”라면서 쫓아왔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씨는 있는 힘을 다해 “아니에요. 아무 관계 아니에요. 저 사람 제발 저 좀 안 따라오게 해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정작 소리는 모기소리만하게 울려나왔다.

그때부터 이씨는 가끔 정신을 놓기도 했다. 어느 틈엔가 박씨의 말이 다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크게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울음이 터지거나 날카로워져 누구에게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고소 뒤에도 세 차례 폭행

이씨 달리 박씨는 학교쪽에 논리적이고 지능적으로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가해혐의를 주로 이씨에게 뒤집어 씌우는 방식이었다. 1월 초, 학교에서 이렇게 통보해왔다.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의 일로 더이상 학교에 이야기하지 말라.”

1월 중순께 이씨는 마지막으로 학교 관계자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났다. 대부분 두 사람의 남녀관계로 여기고 있었다. 이씨가 박씨를 유혹했다가 찬 걸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학교의 한 관계자는 이씨에게 “키스도 해봤다면서?”라고 대놓고 묻기도 했다. 경황이 없고 공포에 질려 있던 이씨는 이런 성희롱에도 분노하지 못했다. 자신이 모든 죄를 거꾸로 뒤집어 쓰고 있다는 느낌만 살갗을 후벼파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씨는 1월27일 박씨를 폭행과 협박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그뒤 박씨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세 차례 더 이씨를 폭행했다. 고소를 했다는 이유로 한 차례, 이유없이 한 차례, 자기 친구에게 책을 빌렸다고 또 한 차례 폭행한 것이다. 한번은 경찰이 출동했지만 박씨의 논리적인 설명에 따라 둘이 같이 싸운 것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씨는 박씨가 치밀하고 꼼꼼하다고 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공책 한권분의 일지를 써가지고 다닐 정도라는 것이다. 이씨가 3월말 폭행건을 묶어 추가고소를 하자 박씨는 이씨로부터 폭행과 성희롱을 당했다며 4월초에 맞고소를 하기도 했다. 박씨의 고소건은 대부분 무혐의처분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재판은 6월27일에 열린다.

박씨를 만나고자 했으나 그의 변호사는 “모든 문제는 재판을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거절했다. 다만 “박씨는 전혀 이씨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씨 역시 부모님에게 전화해 박씨쪽을 협박했기 때문에 양쪽 다 문제가 있다”면서 “이 사건은 스토킹사건이 아니라 둘 사이의 단순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여전히 전화벨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사람들을 만나길 극도로 꺼린다.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더 이상 박씨가 가까이에 올 수는 없게 됐지만 늘상 불안하다. 이씨를 상담했던 전지홍 정신과전문의는 그가 “전형적인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고 말한다. 극심한 심리적, 정신적 충격을 입었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사고를 겪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씨는 “나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금까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당한 일이 스토킹이라는 인식은 분명히 갖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스토킹을 당한 것 같다. 사실 내가 당한 일이 스토킹이냐 아니냐는 건 중요하지 않다. 뭐라고 부르건 한 사람의 일상을 앗아가고 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행위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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