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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도입한 유산유도제, 한국선 안 돼…도대체 언제까지?

일본도 유산유도제 도입 승인… 95개국이 허용한 WHO 필수의약품, 한국도 도입 시급해
등록 2023-05-27 04:04 수정 2023-06-01 08:12
‘낙태죄’ 법적 실효 상실 2주년 맞이 ‘낙태죄’ 폐지 2주년 4.9 공동행동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 행사가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김혜윤 한겨레 기자 unique@hani.co.kr

‘낙태죄’ 법적 실효 상실 2주년 맞이 ‘낙태죄’ 폐지 2주년 4.9 공동행동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 행사가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김혜윤 한겨레 기자 unique@hani.co.kr

지난 4월 21일, 일본 후생노동성은 마침내 유산유도제 ‘메피고팩’의 도입을 결정했다. 메피고팩은 유산유도제를 판매하는 글로벌 제약회사인 라인파마(Linepharma)의 자회사 라인파마 KK(Linepharma KK)가 출시하는 제품명으로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과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을 하나의 상자에 담아 판매한다. 같은 형태의 약이 캐나다에서는 미프지미소(Mifegymiso)라는 제품명으로 제공되고, 호주에서는 MS 2-Step™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미국 의학 연구기관 ‘가이너티 건강 프로젝트’(Gynuity Health Projec)t가 정리한 최신 자료에 따르면 올해 사용이 승인된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총 94개국에서 미페프리스톤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은 이제 95번째 나라가 된 것이다.

유산유도제 WHO 필수의약품 등재

미페프리스톤은 임신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효과를 차단하는 약이고, 미소프로스톨은 자궁수축과 자궁경부의 이완을 유도하는 약이다. 임신 10주까지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할 때의 임신중지 성공률은 95% 이상 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에 처음으로 "국가별 법에 따라 허용되고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라는 메모를 달아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공식 유산유도제로서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했다. 그리고 2019년에는 WHO 전문가위원회에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보완 목록에서 핵심 목록으로 이전하고, 약품 정보에 있던 "면밀한 의료 감독 필요", "국가별 법에 따라 허용되고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라는 메모도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의료인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도 큰 후유증 없이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전성을 지닌 약이라는 사실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산유도제의 접근성 확대와 각국의 사례

WHO가 이처럼 유산유도제의 안전성을 거듭 확인하면서 필수핵심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임신중지에 대한 법‧제도적 제약이 크고 의료접근성이 낮을수록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로 인한 후유증과 모성사망률이 커진다는 사실이 꾸준히 보고되어 왔기 때문이다. 2019년에 발행된 WHO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2014년 사이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의 97%인 2천4백3십만 건이 임신중지에 대한 제약이 큰 저소득 및 중간소득 국가에서 발생했고, 세계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로 인한 모성 사망은 전체 모성 사망의 4.7%~13%에 달했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과 낙인이 강한 국가일수록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환경은 더욱 음지화되고, 의료인들은 제대로 된 상담과 정보, 후유증 관리 등을 제공하기가 어려우며, 의료비 또한 비공식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안전하지 않은 의료환경에서의 임신중지는 이후의 임신이나 출산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는 건강과 생명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사실상 한 국가가 여성 건강과 사회 전반의 재생산 건강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에 대해 무시하고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WHO는 2022년 안전한 임신중지 가이드에서는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을 형법에서 아예 삭제하도록 하는 전면 비범죄화를 각국에 권고했고, 의료비에 대한 부담을 낮추고 시술뿐 아니라 약에 대한 접근성도 최대한 높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캐나다·뉴질랜드, 임상간호사도 처방할 수 있어

캐나다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도입되었으나 2015년 승인, 2017년부터 공급을 시작한 이후 의료인들의 적극적인 근거 제시로 도입 1년만에 약물 사용에 관한 불필요한 규제 절차가 모두 폐지되었다. 처음에는 별도의 교육과 인증을 받고 제조사에 등록한 의사만이 처방전을 줄 수 있었고, 임신중지를 하려는 여성은 의사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어야 했으나, 의료인들과 연구진이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장의 사례와 임상경험을 모았다. 그리고 약사, 가정의, 임상간호사, 의사 등 150명을 인터뷰하여 정부에 월례보고서를 제출하며 비디오 컨퍼런스를 개최한 결과, 11개월만에 정부가 관련 규제들이 모두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지금은 산부인과 전문의 외에도 임상간호사, 가정의 등도 처방전을 발행할 수 있고,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여성도 처방전만 있으면 약국에 가서 약물 복용에 필요한 정보를 듣고 몇 개의 체크리스트를 작성한 후에 약을 받을 수 있다. 처방을 받고 구입한 약을 먹을지 안 먹을지, 언제 먹을지는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 복용 후 경과나 증상 등은 병원과 약을 구입한 약국 어디에서든 상담과 연계지원이 가능하다. 또한 2019년에는 처방 전 초음파 검사 의무도 삭제되었다. 뉴질랜드는 2001년에 승인되었고 현재 임신 9주-10주까지 병원, 지역 클리닉, 가족계획 클리닉 등에서 약을 제공받을 수 있고, 병원이나 클리닉 방문이 어려운 경우 전화로도 처방과 배송을 요청할 수 있다. 캐나다와 뉴질랜드 모두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약이 무료로 제공된다.

가장 최근에 유산유도제를 승인한 일본의 경우 형법에서 ‘낙태죄’를 규정하고 모체보호법에 따라 성폭력에 의한 임신, 신체적·경제적 이유로 임신을 지속하기 어려운 경우에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법 개정과 함께 유산유도제 도입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어 왔다. 지난 해부터 승인이 구체적으로 전망되었으나 후생노동성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승인이 되었는데 유산유도제 도입과 접근성 보장을 촉구해 온 단체인 일본안전한유산을위한행동(ASAJ) 를 비롯하여 여러 여성들과 활동가, 단체들은 접근성 보장에 있어 아쉬움이 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30여년 간의 임상결과에 따라 세계보건기구에서도 약의 처방과 공급자를 확대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 이번 승인 조건에 따르면 모체보호법에 따른 지정 의사만이 약물의 처방과 투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복용 후 임신중지가 확인될 때까지 병원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침대가 있는 병원과 클리닉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 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아 의료기관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게 되어 1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가 약의 안전성을 거듭 확인하며 당사자에게 비용과 약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을 최대한 확대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만큼 일본에서도 도입 이후 관련 규제는 계속해서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비공식적인 유통, 배송과 안전 문제

우리나라도 더 이상 유산유도제 도입을 미뤄서는 안된다. 유산유도제의 공식 승인과 도입이 유산유도제가 비공식적으로 유통되고 이용되는 지금의 상황보다 훨씬 안전하고 임신중지가 필요한 경우 그 시기를 지연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병원이 아닌 온라인 등을 통해 약을 구하는 경우 약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2주 이상 소요되거나 배송 과정 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고 임신기간에 따른 효과, 약의 복용과 임신중지 전후 알아두어야 할 사항, 임신중지 과정 중에 고려할 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정보와 용량, 복용법 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2021년 발행한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인터뷰 결과 보고서>는 심층인터뷰 참여자 중 유산유도제 복용을 시도했던 이들이 병원에 대한 접근성 문제, 의료기관의 임신중지 거부, 경제적 부담 등의 문제로 유산유도제를 구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실패했던 경험을 담고 있다. 한편, 현재 병원에서 약을 이용하여 내과적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하는 경우 미소프로스톨을 오프라벨(의료인의 재량에 따라 허가된 적응증 외의 용도로 사용)로 사용하거나 메토트렉세이트 등 다른 약을 사용하는데 이 역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할 때보다 성공률이 낮고, 정확한 정보와 안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안전성이 떨어진다.

보건사회연구원의 <2021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서도 76.6%의 응답자가 '의사에게 처방 받아서' 약을 구했고, '지인 또는 구매 대행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구매'했다는 응답자는 14.9%에 불과했으나, 대부분의 응답자가 약의 복용법과 임신기간에 따른 효과, 복용에 따른 증상과 후유증을 알지 못했다고 답했다. 74.5%는 '약의 복용(삽입) 방법'을 몰랐으며, 66%가 임신기간에 따른 효과를 알지 못했고, 63.8%는 '약 복용 이후 나타날 수 있는 증상과 후유증'을 알지 못했다 .

한국도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반면, 약을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국가에서는 안전성이 훨씬 높게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 42만3천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미페프리스톤 사용 후 병원 입원, 수혈 또는 심각한 감염과 같은 부작용은 0.01~0.7%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작용은 대부분 큰 후유증 없이 치료가 가능한 경우였다. 2018년 발행된 WHO의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 가이드에서는 사용 방법에 대한 지침, 합병증을 인식하는 방법,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고, 그간의 연구 결과에 따라 임신 12주 미만인 경우 산부인과 전문의 뿐만 아니라 숙련된 조산사, 간호조무사도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를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약 자체의 위험성이 아니라 공식적인 의료 지원과 정확하고 도움이 되는 정보의 제공, 후유증이나 건강상의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보건의료 연계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인 것이다. ‘낙태죄’가 법적 실효를 다한 지도 벌써 2년 6개월이 지났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유산유도제의 필수의약품 지정과 도입을 미룰 이유가 없다.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기 위한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의 할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보장 네트워크는 6월 15일까지 식약처에 보낼 다수인 민원을 모으고 있다. 진정서를 아래 주소(https://bit.ly/미프진진정서)에서 내려받아 서명한 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17길 14 엘림빌딩 3층)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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