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요? 안 맞아요.” “왜요?” “무섭잖아요. 마루타도 아니고.”
최근까지 일하던 치과병원에서 코로나19 백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무섭다며 안 맞는다’는 말을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들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 조금 지나, 비슷한 이야기가 뉴스에도 보도된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백신 우선접종 대상인 몇몇 간호사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실험대상이 되기 싫다’며 접종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마루타 또는 실험대상이라는 인식이다. 이미 대규모 임상실험이 끝나 사용 허가가 나온 백신이므로 ‘실험대상’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다. 실험대상이란 말을 여기에 적용하면 코로나19뿐만 아니라 모든 사항에서 우린 실험대상이 되니까 이렇게 말하는 건 틀린 일이야, 라고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모두가 반복하는 실수를 지금 반복하던 참이다.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경이의 대상이지만, 한편 불안(불안과 공포 모두 두려운 감정을 기술하지만, 불안은 대상이 불명확할 때, 공포는 명확할 때 사용한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바꿀 세상이 놀랍지만, 우리는 일자리를 빼앗길까봐 불안해한다. 특히 의학과 공중보건의 과학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괴롭힌다. 예컨대 방사선 사진으로 우리는 이전에 알 수 없던 몸속을 비교적 쉽게 살펴볼 수 있지만, 방사선 노출로 인한 피해를 염려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염려를 끼쳐왔던 대표적 공중보건 접근 방법이 백신이다.
백신 반대 운동은 19세기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대항해 우두 백신을 시행한 때부터 나타났다. 따라서 백신이란 말이 생길 때부터 반대 운동도 같이 있었다. 백신 반대 운동을 이끄는 핵심은 백신 안전성이다. 물론 백신 반대 운동과 그 영향을 다룬 하이디 라슨의 책 <스턱>(Stuck)은 백신 반대 운동이 과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그 뒤의 사회·문화·정치적 요소가 결합해 나타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여러 요소는 안전성을 축으로 모인다. 백신은 ‘인공’ 화학물질이고 그것이 내 몸에 주사의 형태로 들어오는 것은 불안하다. 당장 어떤 치료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맞아야 하는가, 라는 의구심에 정치적 입장이, 문화적 견해가 더해진다.
2월26일부터 국내 접종을 시작한,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공동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65살 이상에게는 접종을 보류한 상태다. 우리 질병관리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독일 로베르트코흐연구소(RKI) 산하 예방접종위원회가 65살 이상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보류 결정을 내린 것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 이유는 임상실험에서 65살 이상 대상자 수가 충분하지 않음에 따라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는 코로나19 예방 효과가 불확실하므로 효과가 증명된 청장년에게 먼저 주사하자는 것이지,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기에 접종을 미룬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국내에선 이 소식을 마치 65살 이상에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백신 접종이 미뤄진 것처럼 다뤘다. 물론 이런 반응이 국내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사실 백신이 ‘맞아야 하는 어떤 것’, 즉 당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문제다. 여러 공중보건적 개입이 그렇지만 백신은 개인에게 따라야 할 의무를 지운다. 이 의무감은 백신과 주사에 대한 공포 위에 덧입혀져 백신을 부정적 대상으로 만든다. 특히 프랑스에서 백신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건 개인 자유의 침해 때문이다.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인공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실과 당위는 다른 체계에서-전자는 이성, 후자는 감정- 움직인다는 도덕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참고한다면, 백신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려는 건 적절한 접근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백신 접종이 ‘맞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감정의 문제라면, 사실의 시비를 가려선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거부하는 이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에 있다.
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술지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은 최근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할지에 관한 논문을 두 편 실었다. 하나는 행동경제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백신을 접종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지에 관한 전략을 열두 가지로 살폈다. △공통의 적 만들기 △비유 사용하기 △백신 접종자를 더 많이 드러내기 △자원 부족 부각하기 △낙오 우려(FOMO·Fear of Missing Out) 활용하기 같은 전략은 심리적 경향성을 활용해 백신을 빨리 맞도록 사람들을 유도한다. 백신 접종을 주저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전략도 중요하지만, 이는 접종을 거부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한편 심장내과 전문의이자 칼럼니스트인 리사 로젠바움은 약간 다른 각도에서 코로나19 백신 거부를 생각한다. 백신을 거부하는 일이 ‘안아키’(‘병원 안 가고 아이 키우기’의 약자로, 한때 국내에서 유행한 현대의학·백신 반대 운동), ‘태극기 부대’와 같은 낙인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이들이 백신을 맞도록 마음을 돌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낙인은 배제로, 배제는 행동 불능으로 이어진다. 이 연쇄를 끊으려면 낙인 대신 공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로젠바움의 조언이다.
과연 사회는 백신 거부자들의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해결책으로, 백신 이상반응자가 받은 처치에 관해 제대로 알리는 방법이 있다. 코로나19 백신은 심각한 접종 이상반응이 나타나는 경우 국가에 보상 신청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알지 못하거나 이상반응이 생기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 사회는 손을 놓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보여온 각자도생의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명의료계가 기술과 의료의 대상자에게 손을 내밀고 안정과 회복까지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탓도 있다.
낙인과 경제적 짐을 어떻게 나눠 질 것인가문제 인식을 좀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결국 코로나19 감염도, 백신 접종 뒤 이상반응도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니다(물론 드물게 개인의 책임일 수도 있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 수칙을 위반하거나 마스크 착용을 잘못한 경우, 백신 반대 음모론을 고의로 퍼뜨렸을 경우 등이다). 그렇다면 감염과 이상반응의 결과로 발생한 사회적 낙인과 건강상 피해, 사회경제적 짐을 사회가 어떻게 나눠서 지고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이, 백신 반대 운동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김준혁 <아픔은 치료했지만 흉터는 남았습니다> 저자·의료윤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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