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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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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먹은 그녀’와 나는 달라”

여성들이 ‘조직논리’에 말리는 순간
등록 2018-12-10 19:3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팀장 진급에서 떨어진 여자 선배, 본인은 성차별이라고 분개하지만 선뜻 동의가 안 된다. 그렇다고 성차별이 아니라 하기도 찝찝한 이 상황, 어떻게 봐야 할까?”

첫 직장에 과장 40명 중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입사 뒤 계속 온라인 상담 업무만 했던 그녀는 다양한 업무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상급자에게 팀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얼마 뒤 “과장급 여직원을 받겠다는 본부장이 없다”는 답을 듣고 사표를 냈다. 그녀는 몇 년 후배인 나를 붙들고 부당함과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녀의 상실감에는 공감했지만 속에선 ‘여태 편하게 일하다가 갑자기 그게 되겠어요. 선배가 좀 안이했죠’ 하는 말들이 돌아다녔다.

그녀가 퇴직하고 4년이 지나는 동안 여자 과장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애초 얼마 있지도 않았던 내 여자 동기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다음은 내 차례임이 뻔한데도 ‘글쎄, 나는 너희랑 다르다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과 달리 나는 ‘조직논리’를 알고 있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전적 과제도 밤새워 완성해내는 근성과 능력이 있기에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 역시 과장 승진을 앞두고 퇴직을 권고받았다. 여자에게 줄 과장 자리는 없다는 ‘정직한’ 말과 함께.

주변에 당시 이야기를 하면 서운한 반응이 돌아온다. ‘네가 조금 더 노력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했으면 또 달랐을 수도 있어, 차별? 뭐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 이런 마음의 소리들이 들린다. 모두 내가 과거에 사표를 낸 선배를 두고 품었던 마음이다.

이론으로서가 아닌 구체적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부딪치는 장벽이 있다. 나라면 다를 것 같다는 못 말리는 믿음이 그것이다. ‘유리천장’ ‘유리벽’의 존재를 다룬 기사에는 공감하면서도, 내 직장 동료가 당한 차별 대우에는 “꼭 성차별이겠어, 그 친구가 문제가 좀 있지, 나는 안 그래”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성별 대학 졸업 비율은 같아도 취업률, 승진 비율, 비정규직 비율, 임금 격차, 퇴직 시기 등에서 구조적 차별이 반복되고 강화된다는 자료와 연구를 보고 직간접적으로 이를 느끼면서도 막상 닥친 현실에서는 내가 ‘증거’가 되기보다 굳이 예외적인 경험을 확대해석해 ‘나는 다르다’며 외면한다. 평소 성평등 문제에 관심 많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구조의 문제를 조망하기보다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고 실제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회피인 셈이다. 내가 그랬다. 나름 깨어 있다고 자부했지만 구조적인 성차별 문제를 제기한다는 게 내게 얼마나 불리한 일이 될지 알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내가 선배 편에서 부당함을 외치기로 했다면 조직 내에서 여러 불이익을 각오해야 했을 거다. 부당함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터다. 그녀 개인의 문제여야 조직에서 내 안전이 두루 보장되리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당장의 안전이라는 미끼 뒤에 성차별을 양분 삼아 자라는 ‘조직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덥석 물어버린 거다.

영화 에는 주인공 네오가 약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의 비밀은 에서 밝혀진다. 기계들은 막상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면 빨간약을 선택한 네오와 달리 대다수인 99%는 ‘노예라도 좋으니 지금처럼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살 수 있는’ 파란약을 선택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기계는 인간에게 선택권을 줬고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노예가 된 거였다. 구체적 일상에서 불평등 구조를 인식하고 각성하는 것은 실상 1%에 속하는 일이다.

#미투 운동도 어찌 보면 빨간약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빨간약을 선택하라고는 못하겠다. 다만 내가 성차별을 성차별이라 인정하지 않은 순간이 바로 조직논리가 나에게 파란약을 쥐여주는 순간이라는 것을 각성하는 데서 뭐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윤정연 자유기고가*조직논리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불편한 분들은 susanghancenter@gmail.com으로 상담 전자우편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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