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피고인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늑대가 양의 공포를 아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피고인석에서 느끼는 공포를 법대 위에서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법대와 피고인석 간의 거리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법 농단’ 주역들은 이 ‘심리적 거리’를 곧 체감하게 될 것이다. 피고인석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했던 그들이 이제는 법대 위에 앉은 후배 판사들을 올려다봐야 한다. 한때나마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선배들을 재판해야 하는 후배 판사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사법 농단 사건 재판은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세기의 재판’으로 기록될 것이다.
검찰이 12월3일 구속영장을 청구한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제외하곤 가장 높은 직책인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의 뜻에 따라 사법행정을 진두지휘하는 자리다. 앞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보다 직제상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이 이들은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각각 30차례(박 전 대법관), 17차례(고 전 대법관) 공범으로 등장한다. 법원이 이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경우 여론의 후폭풍을 맞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상고법원 열망 양승태, ‘반대자 박병대’ 발탁두 전직 대법관 가운데 박병대 전 대법관의 무게감은 특별하다. 그의 형사처벌이 상징하는 것은 양 전 대법원장 못지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그만큼 사법부 내 보수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법조인이었다.
그는 법원행정처에서 ‘큰형님’으로 통했다. 큰형님은 동생들은 물론 부모에게도 듬직한 존재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부모가 져야 할 짐을 거뜬히 떠맡는다. 갈팡질팡하는 동생들을 다독여 집안의 우환을 말끔하게 처리한다.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는 그의 후배들 가운데는 그를 사석에서 “병대형”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박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를 떠난 뒤에도 그에게 행정처 업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곤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법관을 법원행정처장에 임명한 것은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상고법원을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던 양 전 대법원장은 당시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했던 박 전 대법관을 ‘2인자’로 발탁했다. 그때의 상황을 잘 아는 법원행정처 출신 한 고위 법관은 “상고법원 같은 중요한 제도는 대법관 전체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당시 박 전 대법관은 대법관들 중에서 상고법원을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관 전체회의가 끝나고 얼마 안 돼 그에게 법원행정처장을 맡겼다”고 전했다.
이는 양 전 대법원장이 던진 일종의 승부수였다. 대법관 전체회의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주요 의사를 결정하는 게 관행이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강하게 반대하는 안건이 있으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런 관행을 ‘악용’했다. 상고법원에 가장 비판적인 대법관에게 법원행정처장을 맡기면 상고법원 도입을 앞장서서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 묘수는 적중했다. 박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뒤부터 상고법원 프로젝트는 더욱 강력하게 추진됐다.
‘법원 2인자’ 처장으로 법원행정 깊숙이 관여박 전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기획담당관·송무국장·사법정책실장·기획조정실장을 거쳐 대법관이 된 뒤 다시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대표적 ‘관료 판사’(법원행정처 근무 경력이 많은 판사)다. 법원의 주요 정책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법원행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시절에는 민사재판의 큰 틀을 바꾼 민사소송법 개정 작업을 주도했다. 또 사법정책실장과 기획조정실장을 할 때는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의 역점 사업인 공판중심주의, 영장실질심사 강화, 국민참여재판(배심제) 도입 작업을 이끌었다. 그의 이름 앞에 ‘사법행정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그를 관료 판사로 발탁한 인물은 최종영 전 대법원장으로 알려졌다. 최 전 대법원장은 당시 민사재판 개선 작업을 추진할 송무국장에 전임자보다 사법연수원 기수가 한참 아래인 박 전 대법관을 발탁했다. 이는 각 기수의 선두 주자를 순서에 따라 임명해온 관행을 깬 것이었다. 앞서 송무심의관으로 일할 때 탁월한 일처리 능력을 발휘한 그를 높이 평가한 최 전 대법원장의 결단이었다.
박 전 대법관은 이후 이용훈 대법원장한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 전 대법원장은 퇴임 직전 마지막 대법관 제청 때(2011년 6월) 박 전 대법관을 선택했다. 당시 사법부에는 앞서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대법원 구성 다양화 원칙’에 따라 관료 판사를 대법관에 제청하는 것을 배제하는 흐름이 있었다. 관료 판사를 대법관에 임명해온 관행이 사법부 관료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 흐름을 주도했던 이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마지막 대법관 제청 때는 스스로 이를 깼다. 그만큼 이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법관을 아꼈음을 알 수 있다.
박 전 대법관은 다른 관료 판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가졌다. 바로 ‘정치권 로비’ 능력이다. 그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정권의 성격이 정반대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모두 잘나갔던 게 그 방증이다. 판사 특유의 꼬장꼬장한 이미지가 강하지 않고 사교적이면서 소탈한 성품이 정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주도했던 사법개혁 작업에 사법부를 대표하는 카운터 파트너로 참석해 깔끔한 일처리 능력과 친화력으로 청와대 인사들과 여당 의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박근혜가 총리 제안했으나 고사박근혜 정부 때는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를 같이할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청와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와 고향(경북 영주)이 같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강하게 천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법원행정처 출신의 한 변호사는 “청와대가 황교안 총리에 앞서 박 전 대법관에게 총리를 제안했지만 박 전 대법관은 법원에 남겠다며 고사했다. 총리보다 대법원장이 되는 게 그의 꿈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관 업무’ 능력이 탁월한 박 전 대법관은 검찰에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국회에서 법원과 검찰의 이해가 충돌하는 일을 처리할 때 국회 안에 우군을 많이 만들어 검찰의 입지를 축소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농단 수사 초기에 검찰이 일찌감치 박 전 대법관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말이 돌았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을 ‘강제징용사건 재판 거래’의 핵심 인물로 보고 있다. 검찰은 2014년 10월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등을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 가진 비밀 회동에 박 전 대법관이 참석해 모든 강제징용 소송 진행 경과를 정리해 보고한 것으로 본다. 검찰은 당시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강제징용 재판을 박근혜 정부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려 한 것으로 판단한다.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을 넘은 검찰 수사는 이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검찰은 앞서 임종헌 전 차장의 공소장에 그를 30여 건에 이르는 임 전 차장의 범죄 혐의에 공범으로 적시한 바 있다. 검찰은 12월 중순께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최근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의 한아무개(68) 변호사를 여러 차례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그동안 로펌에 대한 강제 수사를 자제해온 관행을 깨고 11월12일 한 변호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를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양 전 대법원장과 김앤장을 동시에 압박했다. 김앤장은 이 소송에서 일본 우익들의 논리를 그대로 베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조사를 끝으로 사법 농단 수사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당대 내로라하는 사법부 수뇌부가 피고인석에 앉아 후배 법관들 앞에서 재판받는 사상 초유의 일이 내년 초에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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