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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석으로 내려온 법원행정처 ‘큰형님’

‘강제징용 재판 거래’ 의혹

박병대 전 대법관 ‘세기의 재판’ 임박
등록 2018-12-08 10:53 수정 2020-05-03 04:29
박병대 전 대법관이 12월6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박병대 전 대법관이 12월6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판사가 피고인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늑대가 양의 공포를 아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피고인석에서 느끼는 공포를 법대 위에서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고작 몇 미터에 불과한 법대와 피고인석 간의 거리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멀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법 농단’ 주역들은 이 ‘심리적 거리’를 곧 체감하게 될 것이다. 피고인석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했던 그들이 이제는 법대 위에 앉은 후배 판사들을 올려다봐야 한다. 한때나마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선배들을 재판해야 하는 후배 판사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사법 농단 사건 재판은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세기의 재판’으로 기록될 것이다.

검찰이 12월3일 구속영장을 청구한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제외하곤 가장 높은 직책인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의 뜻에 따라 사법행정을 진두지휘하는 자리다. 앞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보다 직제상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이 이들은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각각 30차례(박 전 대법관), 17차례(고 전 대법관) 공범으로 등장한다. 법원이 이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할 경우 여론의 후폭풍을 맞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상고법원 열망 양승태, ‘반대자 박병대’ 발탁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014년 10월7일 국정감사에서 인사말을 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박병대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뒤를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014년 10월7일 국정감사에서 인사말을 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박병대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뒤를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두 전직 대법관 가운데 박병대 전 대법관의 무게감은 특별하다. 그의 형사처벌이 상징하는 것은 양 전 대법원장 못지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가장 유력한 인사였다. 그만큼 사법부 내 보수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법조인이었다.

그는 법원행정처에서 ‘큰형님’으로 통했다. 큰형님은 동생들은 물론 부모에게도 듬직한 존재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부모가 져야 할 짐을 거뜬히 떠맡는다. 갈팡질팡하는 동생들을 다독여 집안의 우환을 말끔하게 처리한다.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는 그의 후배들 가운데는 그를 사석에서 “병대형”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박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를 떠난 뒤에도 그에게 행정처 업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곤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법관을 법원행정처장에 임명한 것은 그의 이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상고법원을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던 양 전 대법원장은 당시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했던 박 전 대법관을 ‘2인자’로 발탁했다. 그때의 상황을 잘 아는 법원행정처 출신 한 고위 법관은 “상고법원 같은 중요한 제도는 대법관 전체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당시 박 전 대법관은 대법관들 중에서 상고법원을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관 전체회의가 끝나고 얼마 안 돼 그에게 법원행정처장을 맡겼다”고 전했다.

이는 양 전 대법원장이 던진 일종의 승부수였다. 대법관 전체회의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주요 의사를 결정하는 게 관행이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강하게 반대하는 안건이 있으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런 관행을 ‘악용’했다. 상고법원에 가장 비판적인 대법관에게 법원행정처장을 맡기면 상고법원 도입을 앞장서서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 묘수는 적중했다. 박 전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뒤부터 상고법원 프로젝트는 더욱 강력하게 추진됐다.

‘법원 2인자’ 처장으로 법원행정 깊숙이 관여

박 전 대법관은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기획담당관·송무국장·사법정책실장·기획조정실장을 거쳐 대법관이 된 뒤 다시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대표적 ‘관료 판사’(법원행정처 근무 경력이 많은 판사)다. 법원의 주요 정책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법원행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시절에는 민사재판의 큰 틀을 바꾼 민사소송법 개정 작업을 주도했다. 또 사법정책실장과 기획조정실장을 할 때는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의 역점 사업인 공판중심주의, 영장실질심사 강화, 국민참여재판(배심제) 도입 작업을 이끌었다. 그의 이름 앞에 ‘사법행정의 달인’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그를 관료 판사로 발탁한 인물은 최종영 전 대법원장으로 알려졌다. 최 전 대법원장은 당시 민사재판 개선 작업을 추진할 송무국장에 전임자보다 사법연수원 기수가 한참 아래인 박 전 대법관을 발탁했다. 이는 각 기수의 선두 주자를 순서에 따라 임명해온 관행을 깬 것이었다. 앞서 송무심의관으로 일할 때 탁월한 일처리 능력을 발휘한 그를 높이 평가한 최 전 대법원장의 결단이었다.

박 전 대법관은 이후 이용훈 대법원장한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 전 대법원장은 퇴임 직전 마지막 대법관 제청 때(2011년 6월) 박 전 대법관을 선택했다. 당시 사법부에는 앞서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된 ‘대법원 구성 다양화 원칙’에 따라 관료 판사를 대법관에 제청하는 것을 배제하는 흐름이 있었다. 관료 판사를 대법관에 임명해온 관행이 사법부 관료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 흐름을 주도했던 이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마지막 대법관 제청 때는 스스로 이를 깼다. 그만큼 이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법관을 아꼈음을 알 수 있다.

박 전 대법관은 다른 관료 판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가졌다. 바로 ‘정치권 로비’ 능력이다. 그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다. 정권의 성격이 정반대인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모두 잘나갔던 게 그 방증이다. 판사 특유의 꼬장꼬장한 이미지가 강하지 않고 사교적이면서 소탈한 성품이 정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주도했던 사법개혁 작업에 사법부를 대표하는 카운터 파트너로 참석해 깔끔한 일처리 능력과 친화력으로 청와대 인사들과 여당 의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박근혜가 총리 제안했으나 고사

박근혜 정부 때는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를 같이할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청와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와 고향(경북 영주)이 같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강하게 천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법원행정처 출신의 한 변호사는 “청와대가 황교안 총리에 앞서 박 전 대법관에게 총리를 제안했지만 박 전 대법관은 법원에 남겠다며 고사했다. 총리보다 대법원장이 되는 게 그의 꿈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관 업무’ 능력이 탁월한 박 전 대법관은 검찰에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국회에서 법원과 검찰의 이해가 충돌하는 일을 처리할 때 국회 안에 우군을 많이 만들어 검찰의 입지를 축소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농단 수사 초기에 검찰이 일찌감치 박 전 대법관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말이 돌았다.

검찰은 박 전 대법관을 ‘강제징용사건 재판 거래’의 핵심 인물로 보고 있다. 검찰은 2014년 10월 당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등을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 가진 비밀 회동에 박 전 대법관이 참석해 모든 강제징용 소송 진행 경과를 정리해 보고한 것으로 본다. 검찰은 당시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강제징용 재판을 박근혜 정부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려 한 것으로 판단한다.

박병대·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을 넘은 검찰 수사는 이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검찰은 앞서 임종헌 전 차장의 공소장에 그를 30여 건에 이르는 임 전 차장의 범죄 혐의에 공범으로 적시한 바 있다. 검찰은 12월 중순께 양 전 대법원장을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최근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대리한 김앤장의 한아무개(68) 변호사를 여러 차례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그동안 로펌에 대한 강제 수사를 자제해온 관행을 깨고 11월12일 한 변호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를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양 전 대법원장과 김앤장을 동시에 압박했다. 김앤장은 이 소송에서 일본 우익들의 논리를 그대로 베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의 조사를 끝으로 사법 농단 수사를 마무리할 방침이다. 당대 내로라하는 사법부 수뇌부가 피고인석에 앉아 후배 법관들 앞에서 재판받는 사상 초유의 일이 내년 초에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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