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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회사의 갑질지수는 몇 점입니까

‘직장갑질119’ 1년 제보 2만3천 건 바탕 ‘갑질지수’ 만들어

체육대회 행사 참여 강요 등 ‘직장 내 악습’ 여전한 상황
등록 2018-11-20 17:11 수정 2020-05-03 04:29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영상 수집하세요.” “녹음 애플리케이션(앱) 추천해주세요.” “녹음 앱을 켜고 나서 지갑처럼 생긴 스마트폰 케이스의 덮개로 화면을 덮으세요.” 자칫 사진, 영상불법 촬영자들의 비밀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불법 촬영자도, 유포자도 아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익명으로 들어온 이들은 직장에 다니는 ‘을’들이다. 11월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간 이 오픈 채팅방에서 ‘녹음’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횟수는 95차례에 이른다. ‘녹취’도 35차례나 나왔다.

폭행과 달리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 법적 근거가 없는 탓에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직장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우울증에 빠져 치료하더라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없다. 회사도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는 직원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 삼으면 업무상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당했다. 사정이 이렇자 ‘을’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녹음과 촬영까지 자청하면서 갑질을 뒷받침할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을’들이 느낀 갑질 평균 점수 35점</font></font>

직장갑질119가 이른바 ‘갑질지수’ 조사를 처음 시도한 이유다. 갑질지수는 직장인들이 주관적으로만 느끼던 ‘갑질’의 정도를 처음 수치화한 지수다. 직장갑질119는 지난해 11월 출범 후 1년간 접수한 갑질 제보 2만2810건을 바탕으로 10개 영역에 68개 문항을 만들었다. 부당한 업무지시, 폭언, 따돌림, 차별, 괴롭힘, 사비로 비품 구매, 회식·행사 참석 등 2만여건의 제보에서 거듭 언급됐지만 지금까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갑질을 직장에서 겪거나 봤는지 물었다. 11월8일부터 12일까지 리서치업체 ‘엠브레인’에 의뢰해 20~55살 남녀 직장인 1천 명에게 온라인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을들이 느낀 갑질 평균 점수는 35.0점이다. 항목별로 5점 기준으로 조사한 뒤 100점으로 환산한 수치다.

문항별로 살펴보면 40점이 넘는 갑질은 68개 문항 가운데 16개에 이른다(표 참조). 5분의 1 수준이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인터뷰에서 “평균(35.0점)과 견줘 40점대 문항은갑질 정도가 심각하다고 봤다. 50점 이상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20점대가 나왔더라도 지역·연령·성별·고용형태·직장유형·직업·혼인 여부·학력·근로시간·임금별로 개별 집단 사이에 의미 있는 점수 차이가 있는지 살폈다. 직장인들이 느끼는 갑질을 수치화하는 조사가 처음이어서 기준점을 평균으로 잡고 갑질의 심각성을 따졌다”고 했다.

을들이 갑질을 가장 많이 느낀 때는 회사 쪽이 처음 약속한 대로 노동조건을 지키지 않았을 때다. 이는 폭행, 폭언 등으로 논란이 된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갑질’뿐만이 아니라 근로조건에 어긋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많은 직장인이 갑질을 당한다고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 68개 문항 가운데 ‘취업정보사이트에 적힌 채용 정보와 달랐다’가 가장 점수(47.0점)가 높았다. 이 밖에 ‘채용면접에서 제시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44.3점) 등 노동조건에 대한 문항이 평균점수(35.0점)를 웃돌았다.

조사에 참여한 을들이 꼽은 갑질은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을들은 ‘외모, 연령, 학력, 지역, 비정규직,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는다’(40.8점)거나 ‘부하 직원을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한다’(42.0점)고 답했다. 하지만 현행 근로기준법으로는 직장 내 차별과 괴롭힘 등을 처벌할 수 없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근로자를 폭행하는 것을 금지할 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3년 이하의 징역 등에 처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괴롭힘의 정의가 모호하다며 국회에서 계류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 병원의 체육대회 장기자랑에서 간호사들이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춤 공연을 펼쳐, 갑질 체육대회가 논란이 됐다. 이후 체육대회는 없어졌다. 노동조합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조사 결과 ‘회사에서 원하지 않는 음주·노래방 등 회식 문화를 강요한다’(40.2점), ‘체육대회·단합대회 등 비업무적인 행사를 강요한다’(40.1점) 등의 문항이 여전히 평균을 웃돌았다. 아직도 직원들을 회식이나 행사 등에 참석하도록 하는 조직 문화가 남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수치다. 실제로 최근 한 회사는 주말에 열린 체육대회에 빠진 직원들에게 사유서를 내라고 지시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비스 직군은 ‘CCTV 감시’에 가장 공분</font></font>

지난해 12월 한 육아종합지원센터장이 직원에게 자신의 논문 대필 등을 강요했다가 갑질로 논란이 되자 해임된 사례가 있었다. 이번 조사에서도 자신이 맡은 업무인데도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일을 반복적으로 전가, 강요한다’(41.6점)는 점수가 높게 나왔다. 을들은 업무 시간이 아닌데도 카카오톡, 문자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수시로 업무를 지시받았다(40.0점). 조기 출근이나 야근까지 강요받았다(40.0점). 심지어 장시간 노동에도 연차휴가조차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43.6점). 이 때문에 ‘주 52시간 이상 일한다’고 밝힌 장시간 노동자들은 ‘시간 외 수당을 받지 못하거나 일부분만 받는다’(58.7점)에 가장 높은 갑질을 느꼈다.

이번 조사에서 상용직(34.6점)과 임시직, 일용직, 아르바이트, 시간제 파견용역·사내 하청을 포함한 비상용직(35.5점)이 느끼는 갑질 평균 점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다만 비상용직은 상용직보다 ‘회사 쪽과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거나 받지 않았다’(42.0점)거나 ‘아파도 불이익 때문에 연차나 병가를 쓰지 못했다’(40.9점). 일용직이라고 밝힌 을들은 ‘직장 내 쉴 수 있는 공간이나 시설도 없는 처지’(53.3점)였다.

반면 상용직은 ‘인사 문제’(42.1점)나 ‘회사 회식과 행사에 참석을 강요하는 조직 문화’(41.3점) 등에서 비상용직보다 갑질을 많이 느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갑질지수가 가장 높은 서비스직들은 ‘회사 쪽이 폐회로텔레비전(CCTV)이나 전자통신기기로 업무를 감시한다’(44.6점)며 사무직과 생산직 등 다른 직장인들보다 공분했다. 국내 대기업(36.5점), 중견기업(36.0점), 중소기업(37.2점) 등 사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 느끼는 갑질 평균 점수도 비슷했다. 다만 직장갑질119는 이번 조사에 참여한 응답자 수가 사기업과 그 외 기관과 차이가 있어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행정부처·지자체(30.0점), 공공기관(24.5점), 교육기관(29.3점) 등 20∼30점대 초반에 그친 공공 분야 직장인들과 견줘 사기업 직장인들의 갑질지수가 높은 편이라고 진단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갑질감수성지수’ 개발도 계획</font></font>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그동안 ‘을’들이 부당하다고 느낀 갑질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직장인 1천 명에게 조사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했다. 류우종 기자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그동안 ‘을’들이 부당하다고 느낀 갑질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어 직장인 1천 명에게 조사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했다. 류우종 기자

직장갑질119는 이번에 만든 갑질지수를 활용해 사기업 동종 업계 내 갑질 정도를 정밀하게 조사할 계획이다. 같은 업종 안에서 어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의 갑질 정도가 높은지 세부적으로 비교분석하는 조처다. 이후 ‘갑질감수성지수’도 개발할 계획이다. 갑질지수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갑질 정도를 측정하는 지수라면 갑질감수성지수는 자신이 얼마나 갑질에 민감한지 스스로 점검해볼 수 있는 내용의 문항이 담길 예정이다.

박점규 운영위원은 “이번 조사는 그동안 을들이 부당하다고 느낀 갑질을 측정해볼 수 있는 지표를 만들었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이를 직장인 1천 명에게 조사해 수치화했다는 것도 의미 있다”며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시행 등을 통한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직장 내 조직 문화를 바꿀 수 있도록 더 많은 을이 동참해달라”고 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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