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줄기가 뽑히듯, 보수정권 9년 동안 언 땅 아래서 썩고 있던 열매가 하나둘 양지로 나오고 있다. ‘국가정보원 개혁발전위원회’(국정원 개혁위)는 8월3일 국정원이 18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2012년 30개의 ‘민간인 여론 조작 조직’을 운영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사이버 외곽팀’(외곽팀)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충격적인 국정원의 여론 조작 규모</font></font>국정원 개혁위 발표를 보면 국정원은 2009년 5월부터 광우병 촛불시위를 촉발한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맞서기 위한 대응팀 9개를 꾸렸다. 조직은 점점 확대됐다. 알파(α)팀 등의 이름이 붙은 외곽팀은 2012년 30개까지 늘었다. 각 팀들은 ‘아고라’, 4대 포털 사이트, 트위터 등을 담당했다. 외곽팀에 동원된 사람들은 보수적 성향의 예비역 군인, 회사원, 주부, 학생, 자영업자 등이었다. 연인원은 3500명 수준으로 이들에게 들인 한 해 인건비는 30억원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이 민간인을 동원해 온라인 여론 조작에 나선 것은 이미 일부 드러났다. 뽑아내지 않았을 뿐 고구마 줄기는 이미 보였던 셈이다.
첫 단서는 2013년에 나왔다. 는 2013년 2월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김아무개씨가 민간인 이아무개씨와 함께 대선 여론 조작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당시 민간인 이씨는 글만 쓴 것이 아니라 ‘네이트’ 등에서 조회수와 추천수를 조작하는 프로그램까지 사용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에 자신이나 ‘동업자’들이 쓴 글을 노출시키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8월 는 마땅한 직업이 없던 이씨의 계좌에 의문의 돈 9234만원이 2011년 11월부터 2013년 1월 사이 입금된 사실도 보도했다. 이 중 4925만원은 이씨가 직접 자기 계좌에 입금했다. 국정원이 현금으로 지급한 돈일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2013년 11월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감사에서 심리전단을 돕는 대가로 민간인 이씨에게 280만원씩 11개월, 총 3080만원을 지급한 사실을 인정했다. 전체 액수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댓글 알바’를 한 민간인에게 국정원의 ‘돈’이 지급됐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순간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두 줄기가 뿌리를 암시하다</font></font>두 번째 줄기는 이 지난 4월 국정원의 민간 여론 조작 조직 ‘알파팀’을 수면 위로 끌어내면서 ‘발견’됐다. 취재 결과, 국정원은 2008년 12월부터 김성욱 한국자유연합 대표를 리더로 하는 10명 안팎의 민간인 조직을 운영하며 다음 ‘아고라’ 등에 정부를 옹호하고 야당 등을 비판하는 글을 쓰도록 했다. 국정원은 알파팀에 게시글 하나당 2만5천~5만원의 대가를 지급했다.
조금씩 보인 고구마 줄기를 당겨 뿌리 전체를 드러낸 것은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적폐청산 TF)였다. 지난 6월 국정원 개혁위 산하에 꾸려진 적폐청산 TF는 내부 예산 사용 내역, 직원 조사 등을 통해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방대한 규모의 민간인 여론 조작 조직을 꾸린 사실을 밝혀냈다.
알파팀원으로 활동한 ㄱ씨는 이번 발표가 이뤄진 뒤 과의 통화에서 “알파팀 외에 (여론 조작을 위한) 여러 팀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른 팀에 비해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야기 등을 들었기 때문이다. 알파팀 내부에서 다른 팀들을 ‘베타팀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작업이 이뤄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때도 댓글 부대를 운영했는지에 대해선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댓글 작업 경험을 통해 판단해보면, 2012년 이후에도 비슷한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에서 내가 과거에 활동했던 것과 유사한 패턴이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적폐청산 TF는 국정원의 여론 조작 작업과 청와대를 잇는 연결고리도 찾았다. 국정원 개혁위는 최근 가 보도한 ‘SNS의 선거 영향력 진단 및 고려사항’ 문건이 “‘SNS를 국정 홍보에 활용하라’는 청와대 회의 내용을 전달받고 국정원이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는 “총선·대선 대비 여당 국회의원 등 보수권 인사의 SNS 여론 주도권 확보 매진 제안” “중장기로 페이스북 장악력 확대 및 차세대 SNS 매체 선점”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사실상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의 선거운동 방향과 여론 주도권 획득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정원은 2011년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여론 조사도 자체 예산으로 집행한 뒤 이를 분석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정당이 해야 할 일을 국정원이 대신한 셈이다.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 시절 야당이던 민주당 출입 국정원 정보관의 첩보를 바탕으로 손학규·안철수·박원순·우상호 등 주요 야당 정치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처럼 파편적인 각각의 사건은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국정원의 여론 조작, 여당 정책 방향 분석, 야당 정치인 사찰 의혹 등의 활동은 ‘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목표에 수렴된다. 큰 그림을 맞추기 위한 퍼즐의 한 조각을 적폐청산 TF가 채운 셈이다. 국정원 대선 여론 조작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린 전직 국정원 직원 김상욱씨는 과의 통화에서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을 처음 접했을 때 후배에게 ‘이대로 두면 민주주의가 완전히 파괴된다. 선거가 의미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규모 여론 조작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사건은 단순히 ‘댓글 사건’이 아니다. 국정원뿐 아니라 국군 사이버사령부와 청와대 등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민주주의를 붕괴시킨 사건이다. 지금 밝혀진 것도 빙산의 일각뿐이다. 더 많은 사실이 터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최종 책임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정원 적폐청산의 막이 오르다</font></font>국정원 개혁위는 “적폐청산 TF는 향후 면밀한 추가 조사를 통해 국정원법상 정치 관여, 직권남용 등 위법 행위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하나둘 드러나는 국정원 활동은 위법성이 명확하기 때문에 조만간 검찰 수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석연찮은 혼외자 의혹, 윤석열(현 서울중앙지검장) 당시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장의 직무배제와 좌천 등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뤄진 검찰의 첫 번째 국정원 수사는 상처투성이로 끝났다. 하지만 ‘국정원 수사 시즌2’는 다를 것이다. 수사 대상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뿐 아니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까지 닿을 가능성이 있다. 적폐청산의 막이 올랐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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