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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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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상처를 준 건 학교였다

성희롱 예방 교육 가장 안 받는 집단이 교수, 성희롱·성추행 공론화하는 건 산 넘어 산…
구제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장치와 폭넓은 지원책도 마련돼야
등록 2014-12-04 14:47 수정 2020-05-03 04:27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박희원(가명)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의 신원과 사건의 구체적 정황은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3년 전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지도교수를 학내 상담기구에 신고했다.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 잦았다. 여학생들의 몸을 더듬기도 했다. 학교 차원의 조사가 진행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도교수가 바뀌었지만, 등 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교수의 잘못이 이대로 덮이면 어쩌나 불안이 극에 달한 시간이었다. 조사 결과가 나온 뒤, 학교는 교수를 해임했다.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교수는 박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학교를 상대로 해임 처분이 부당하다며 징계 취소를 요청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은 진행 중이다. “어렵게 이어온 학업을 그만둘 각오로 한 일입니다. 후회는 하지 않아요. 그러나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전쟁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몇 년이 흘러도 계속되는 전쟁

교수로부터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당해 문제를 공론화한 학생들은 여러 가지 2차 피해에 노출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있음을 표현한 거리공연 모습. 한겨레 김태형 기자

교수로부터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당해 문제를 공론화한 학생들은 여러 가지 2차 피해에 노출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있음을 표현한 거리공연 모습. 한겨레 김태형 기자

희원씨만의 고통은 아니다. 2013년 8월 ㄱ대학 ㅅ교수는 대학원 학생을 성희롱하고 학생 장학금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는 등의 사유로 해임됐다. 교육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해임 처분 취소를 청구했으나 기각 결정이 내려진다. 교수는 교원소청심사위를 상대로 이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지난 10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해임 처분이 적법하다고 선고한다. 판결문을 보면, 성희롱 피해 사실이 학내 상담기구에 신고된 건 2012년 9월이었다. 그해 11월 조사위가 꾸려졌고, 성희롱이 인정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2013년 2월 상담기구는 징계위원회에 해당 교수의 징계를 요구했다.

교수에게 당한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는 건 산 넘어 산이다. 피해자 대부분은 신원이 노출될까봐 사건 조사 등 공식 절차를 밟는 데 부담을 느낀다. 회유와 협박으로 마지못해 합의하기도 한다. 성희롱·성폭력 피해가 확인돼 징계 처분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교수가 불복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 몇 년씩 사건이 지속된다. 교수가 피해자나 학교 상담기구 책임교수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서울대 여성연구소가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을 받아 작성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피해자들은 피해 구제 과정에서 다양한 2차 피해를 겪고 있었다. 한 피해자는 면접조사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문제제기 뒤) 교수가 나를 퇴학시켜버리겠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 교수를 쫓아다녔다고, 행실이 그런 애라고 모함하고. 나를 아는 학교 재학생들한테 그런 말까지 퍼뜨렸다.” 조사 기간이 늘어지는 경우,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가중된다. 징계위원회가 상담기구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아 피해자 조사를 두번 세번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정년을 보장받는 정교수들의 경우 사건 해결이 더욱 어렵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국공립대 성평등상담센터장은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정교수들 가운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파벌 싸움의 일환으로 자신에 대한 음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라며 “성추행 피해를 익명으로 신고한 대학원생이 있었는데, 지도교수로부터 노골적인 협박을 받았다며 스스로 조사 보류를 요청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정교수들은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대학 안팎에서 10년 가까이 성폭력 사건을 상담해온 김보화(여성학 박사과정)씨 역시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음해라며 반발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유혹했다거나 서로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례도 있다. 교수가 ‘밥 먹을까?’ 했을 때, 학생들이 곧바로 ‘싫은데요’ 반항하지 못한다. 강한 피드백이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보니 교수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경미한 사건에서는 아주 드물게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대가 힘들다고 한다면 사과하겠다’라는 태도다. 이 경우 사과문 작성이나 교육 이수 등으로 사건이 빨리 마무리된다.”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을 예방하고 피해 구제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학교 차원의 근절 의지가 필수적이다. 대학 행정기구의 부속기구가 아닌 독립기구 형태로 성폭력·성희롱 상담기구를 운영하는 곳은 2011년 기준으로 전체 대학 중 약 17%에 불과하다. 많은 대학 내 상담기구가 예산 및 인력 부족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대학도 공공기관이므로 기관장을 포함해 모든 직원을 대상으로 연중 1회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을 해야 한다. 김보화씨는 “교육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경각심을 주는 데 교육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직원·교수·학생 가운데 성희롱 예방교육을 가장 안 받는 집단은 교수다.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학교도 있지만 정교수들은 이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가 성희롱·성폭력 방지와 관련된 항목을 대학평가에 반영하는 등 개선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국외 대학들은 성희롱·성폭력 피해 구제 과정에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장치와 폭넓은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 샌타크루즈 캘리포니아주립대(UCSC)의 경우 피해자가 고소를 결정하면 포괄적인 법률 조력을 한다. 컬럼비아대학에서는 피해자가 진술할 때 영상중계장치를 이용하거나 신뢰관계인을 동석시킬 수 있다. 독일 괴팅겐대학은 피해 학생에게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윗선에 피해 사실을 통지할 권리를 부여한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여지를 없애려는 취지다. 피해자가 원하면 무료로 법률·심리 상담을 지원한다. 또 징계 혐의자에게도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절차적 장치를 마련해 사후 불복 절차에서 쟁점이 될 소지를 줄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잘 살고 있는 모델

최아룡(43) 몸과마음연구소 소장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2001년 지도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총학생회 등과 함께 문제제기에 나섰고, 학교는 교수에게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린다. 학교로 돌아온 교수는 피해자가 있는 연구실에 머무르겠다고 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자 2003년 학교는 해임 처분을 한다. 이후 교수는 교육부 징계재심의위원회에서 구제돼 학교에 복직했다. 최씨는 사건 발생 5년가량이 흐른 뒤에야 피해자 ‘최김희정’(필명)이 아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공개할 수 있었다.

사건을 알리는 과정에서 숱한 상처를 준 건,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내부였다. 사회문제에 진보적 입장을 내놓는 교수라 할지라도,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폭력엔 엄격하지 않았다. 최씨는 대학원에 계속 남았지만,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다. 대신 국외 학회에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교수들이 학생의 운명을 거머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은 지도교수가 추천해줘야 논문도 발표할 수 있다. 다른 방법도 있음을 시도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건 공론화 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잘 살고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또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공론화를 망설이고 있을지 모를 피해자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달라고 청했다. “온갖 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세요. 모든 자료를 보관하세요. 제 경우엔 피해 현장에 있던 후배들이 ‘그날 너무 화가 났다’고 보낸 이메일을 보관해두었어요. 본인을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요. 그러려면 피해가 작을 때 신고해야 해요. 가해자의 행동은 점점 대범해지게 마련입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 참고 문헌‘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2012), ‘대학 내 성폭력·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 연구’(한국여성정책연구원·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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