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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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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4색 독거의 기술

등록 2013-03-23 08:21 수정 2020-05-03 04:27
<font color="#1153A4"><font size="4">몽마(夢魔)와의 기묘하고 기막힌 동거</font></font>태기수 소설 작가·물탱크와 살다가 혼자 산 지 3년째

“담배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그거 이성복의 시 ‘다시, 정든 유곽에서’에 나온 구절이잖아. 나? 그렇게 화급하게 불을 꺼야만 할 지경에까지 이른 적은 없었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 지경까지 가기 전에, 고맙게도, 고요하고 비밀스럽게 내 침대로 왕림해주시는 여인이 있었거든.

그녀가 처음 내 침대를 범하고 나를 범했던 날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고, 그 첫날밤의 기억만큼은 첫 경험처럼 생생하게 내 감각의 지도에 새겨져 있다네, 기러기 친구여! 분명히 혼자 누워 잠들었는데, 누군지 모를 여자가 옆에 바짝 붙어 누워 있는 느낌이 오더란 말이야. 솔직히, 횡재한 기분이더군. 이런, 당신 누구요. 대담하고 화끈한 여자였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와 이래도 되나 싶어 머뭇거린 건 오히려 나였어. 그런 상황에서 그딴 걸 따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란 생각이 문득 들더군. 그냥 모처럼 찾아온 이 횡재의 순간을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난 여자를 덥석 안았네. 이상한 건, 그녀가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느껴진다는 거였어. 아니, 흐릿한 실루엣만 봐서 얼굴은 모르겠어.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그저 성감으로만 기억되는 여자니까. 아무튼 익숙한 몸짓, 친밀한 숨결이었지. 약간 불쾌하지만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빠져든 깊은 잠….

몽마(夢魔), 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난 여자가 침대에 남긴 흔적을 분명히 확인했어.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당연하게도 여자는 없었지만, 침대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어.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에 옆 얼굴을 대고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보았지. 그러다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어. 그게 꼭 그 여자 머리카락이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아무튼…. 그 뒤로도 여자는 가끔 찾아와 비슷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어. 때로는 오늘밤도 그녀가 와주기를 갈망하며 잠자리에 들기도 했지. 목욕재계까지 하고 말이지. 친구, 그렇게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짜식, 너도 기러기인 주제에…. 정말 연인 같았다니까. 사랑, 질투, 미움, 분노… 감정까지 두루 갖춘, 현실적인 존재감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여자였다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이어진, 기묘하고 기막힌 동거였다고나 할까. 쩝! 그게 아쉬워. 이사 오면서 그녀를 데려오지 못한 것. 꿈에서 주소라도 밝히고 오는 건데 말이야. 같이 가자고 말이라도 건네보는 건데….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거지. 뭐 하지만 괜찮아. 화르륵 타오른 욕망의 불을 끄거나 연소시켜줄 새로운 필살기를 연마했거든. 시간 없으니까 그 얘긴 다음에 들려주지. 혼자 지내는 놈은 ‘척’을 잘해야 한다네, 친구.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지내는 척, 외롭지 않은 척, 바쁜 척, 척, 척…. 거, 소주 냄새 풍기며 칭얼칭얼 여기저기 이놈저놈한테 전화질이나 하지 말고.

혼자 사는 남자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그린 MBC ‘남자가 혼자 살 때‘의 한 장면. MBC 제공

혼자 사는 남자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그린 MBC ‘남자가 혼자 살 때‘의 한 장면. MBC 제공

<font size="4"><font color="#1153A4">공공재에 가깝지만 나만의 시간</font></font>

함영준 자유기고가·잡지 동인·공연장 로라이즈 운영자·미술계 종사자… 어쨌거나 자유직종

혼자 사는 나의 생활은 수많은 약속이 모자이크처럼 조립돼 이루어진다. 어떤 음악가는 밤 11시에 나를 불러내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고 들어보라고 한다.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던 어떤 미술작가는 약속시간을 1시간 앞두고 갑자기 몸이 안 좋다며 약속을 다음으로 미룬다. 어떤 에디터는 갑자기 내일까지 뭔가를 번역해달라며 전자우편을 보낸다. 어떤 컬렉터는 갑자기 소장한 그림을 팔아야겠다며 저녁을 먹자고 한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자유직종 종사자에게 생활을 공유하는 타인의 존재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내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아이가 학예회를 한다고, 어머니가 스마트폰에 음악파일을 깔아달라고 했다고 거절할 수는 없다. 이는 나와 비슷한 직종 혹은 처지에 있는 모든 문화 관계자들이 그러할 것이다. 자유직종 종사자의 시간은 공공재에 가깝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해 나의 일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행히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 그러니까 음악가의 노래를 듣고, 미술작가의 고민을 듣고, 다양한 것에 대해 짧은 글을 쓰고, 미술작품 컬렉터들의 통장과 미적 허영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일을 좋아한다. 과정에서 딸려오는 자잘한 스트레스가 많더라도, 원칙적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내가 공공재라고 말했던 나의 시간은 사실 나에게 온전히 있다. 그 온전함을 잘 조율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혼자 사는 편이 낫다.

언젠가 동거인의 존재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다. 그날 나는 빨래건조대 자국이 선명한 옷을 개었고, 9.8kg 용량의 드럼세탁기를 3번 돌렸고, 말라 비틀어진 커피메이커를 닦았고, 방문 뒤편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쓸었고, 봉투째 쌓여 있던 정기구독 주간지를 정리했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CD를 닦아 케이스에 넣었고, 수챗구멍의 머리카락을 끄집어냈고, 냉장고 속 곰팡이 가득한 딸기잼을 버렸다. 그 너저분한 일을 끝내고 침대에 누우니 나는 왜 사람들이 함께 사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원고 마감이 불현듯 떠올랐고, 그날따라 랩톱은 유난히 책장 저쪽 모서리에 있었다. 나는 동거인에게 랩톱을 좀 집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내가 일어나서 혼자 집어들면 되는 일. 혼자 사는 것의 불편은 고작 그 정도다.

<font size="4"><font color="#1153A4">독신의 기술은 잘 그리워하는 일</font></font>

임인택 기자·독신으로 살 수 없는 30대 독거남

요즘 나는 가수 다비치의 만 듣는다. “기다리는 나를 왜 모르시나요. 어느 계절마다 난 기다리는데 그저 소리 없이 울수록 서러워 서러워. 돌아와요 나의 그대여~.” 청아한 목소리의 이해리가 그토록 처절하게 부르짖어 가슴판이 떨려올 때 정말이지 난 저 ‘그대’를 잡아 족치고 싶다.

독신에게 ‘그대’만 한 머스트해브 아이템이 있겠는가. 그대가 없어 독신인데 독신은 그대를 상상으로라도 그리지 않고선 광포한 시절을 건널 수 없다. 난 독거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치마를 입은 채 무릎 꿇은 여성의 하반신 인형이 인형이 아니라, 일본에서 출시된 남성용 베개(여성 무릎 베개)인 것도 저들이 꼭 변태라서기보다 ‘울수록 서러워’ 마침내 ‘돌아온 그대’의 무릎에 눕고 싶은 그리움이 큰 까닭이겠다.

하여 내게 내세울 독신의 기술이 있다면 그건 역설적이지만 잘 그리워하는 일이다. 지우려기보다 애써, 스무 살 시절 허리춤도 잡아보지 못했던 연인을, 사랑하여 눈물이 난다던 이를, 이별 뒤 저 혼자 부대에 면회 온 이를, 헤어지므로 울지 않겠다던 이를 되뇌고 그리워한다. 물론 그리움의 원칙을 둔다. 아니할 경우 그리움은 서정시가 아닌 스릴러가 된다. 어~흥.

1. 출근길에 생각한다. 대학 교문 앞에서 첫 수업 전 나를 기다렸던 여성부터 하나둘.

2. 화분에 물을 줄 때 생각한다. 피곤하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여성부터 하나둘.

3. 요리할 때 생각한다. 뭘 먹어도 나오지 않는다던 배가 결국 나오자 애굣살이라던 여성부터 하나둘.

4. 잠잘 때 생각한다. 치마를 입은 채 나직이 무릎 대주는 기이한 인형 베개부터 하나둘.

5. 퇴근길에 생각하면 술 마시니 안 되겠지.

6. 그 밖엔 술 마셔도 그 생각밖에 아니 날 테니 술 마시면 안 되겠지.

농 삼아 일러보았지만 알짬은 하나, 누군가를, 어떤 시절을, 힘내 그리워하는 일이다. 외로움까지 볶아넣은 독신의 요리, 뉴요커 싱글남다운 집 가꾸기, 체력 관리, 취미? 그보다 내게 중요한 건 감정의 퇴화에 저항하는 일이다. 그리움만으로 허기질 수 있다는 것을 최근 알았다. 배가 고플 때 살아 있는 것 같다. 하여 이제 또 움직인다.

혼자 살기는 때로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0년차 ‘혼자남’ 블로거 이길현씨는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간단하고 창의적인 요리가 특히 인기”라고 말했다. 이길현 제공

혼자 살기는 때로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0년차 ‘혼자남’ 블로거 이길현씨는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간단하고 창의적인 요리가 특히 인기”라고 말했다. 이길현 제공

<font size="4"><font color="#1153A4">독거가 가르쳐준 ‘셀프 셰프’의 길</font></font>

이길현 건축설계사·셀프 셰프·싱글생활 연재 블로거(kilhyun77.blog.me)

내 나이 서른일곱, 혼자 살아온 지 10년이 넘었다. 밥은 사 먹고, 저녁마다 술 마시고, 집안 청소는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오해다. 흔히들 말하는 홀아비 냄새? 또한 오해다. 혼자 사는 남자들도 집을 꾸미고 멋진 요리로 손님을 초대하고, 사람 할 것 하고 산다.

나의 ‘독거의 기술’을 공개한다. 혼자 살기는 사실 심플하다. 풀어 말하면 지금껏 살아오던 패턴을 단순화하며 지내는 것이 혼자 살기다. 첫째, 작은 것을 사랑하라. 장을 볼 때는 항상 소량으로 포장된 식재료를 구매한다. 전기밥솥, 커피메이커, 냉장고, 가구 등 모든 생활용품은 대형으로 구매할 필요가 없다. 둘째, 눈에 보이는 먼지와 쓰레기는 바로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라. 무선 핸디청소기가 유용하다. 마지막, 퇴근 뒤 저녁 식사-TV 시청-취침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습관을 깨야 한다. 늘어져 지내던 시간을 쪼개 쓰며 독거의 기술을 연마한 지 10년째, 처음에는 재미없고 귀찮았던 일들이 어느덧 소소한 취미생활이 되었다. 그중 하나가 요리다.

그동안 몰랐던 나의 재능을 혼자 살면서 발견했다. 시작은 미약했다. 흔히들 하는 달걀프라이, 라면, 된장국…. 하지만 지금은 꽤 난이도 있는 요리도 힘들이지 않고 만들어내는, 나만의 식탁을 차리는 ‘셀프 셰프’가 됐다.

하지만 블로그에 혼자 살기 노하우를 연재하면서 다른 싱글남들에게 지지받았던 요리를 살펴보니 복잡한 요리보다는 간단한 재료로 쉽게 만드는 요리가 더 인기였다. 그동안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은 요리 두 가지를 소개한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하거나, 혹은 손님에게 내놓아도 어느 정도 그럴듯하다. 첫 번째는 ‘달걀범벅 샌드위치’. 식빵이나 부드러운 브라운브레드에 버터를 바른다. 비엔나소시지·양파·파프리카를 잘게 다져 달걀흰자·소금·후추를 뿌려 섞어두고, 그 위에 달걀노른자를 올린 뒤 접시에 랩을 씌우고 전자레인지에 3분간 돌린다. 그다음 슬라이스 치즈를 올려서 다시 랩을 씌워 잔열로 녹이고 잘 섞은 다음 빵에 바르면 끝! 좀 느끼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찬장에 있는 참치와 김을 꺼내 다른 요리에 도전해보자. 참치·김·달걀·김치의 상차림은 왠지 서글프지만 여기에 조금만 아이디어를 더하면 재미있는 한 접시가 나온다. 고추장·참기름·설탕·간장·후추를 섞어서 양념장을 만들고 여기에 밥, 캔참치, 다진 김치를 넣고 비빈다. 김발에 김을 깔고 비벼놓은 밥을 올려 돌돌 말아준 다음 달걀을 풀어서 프라이팬에 얇게 부쳐 김밥을 한 겹 더 말아준다. 작명은 만든 사람 마음대로, 매콤참치김밥. 어떤가. 푸짐한 한 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간단한 것이 최선’이라는 명제를 잊지 말고 당신 안에 숨은 셰프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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