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지도 편달과 최근 20년 동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도움에 힘입어 현재의 세중 가족을 꾸릴 수 있게 됐다.” 2006년 10월15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경기 용인시 세중옛돌박물관에서 열린 개관 7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110억원에 달하는 사재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자신이 보유한 세중나모여행 주식 110만5천 주를 고려대, 연세대, 포항공대 등 대학과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60대 노 회장의 얼굴엔 감회가 서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 자리엔 이상득 국회 부의장의 모습도 보였다.
세중나모 13거래일 만에 40% 폭등
그로부터 약 1년 뒤 천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2007년 11월2일 천 회장은 자신의 세중나모여행 지분 중 50만 주를 9개 단체에 증여했다. 남은 60만5천 주도 보호예수(보유 주식을 일정 기간 팔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풀리는 이듬해에 기부할 것이라고 11월7일 회사 쪽이 밝혔다. ‘행동하는 양심적 기업인’이라는 언론의 칭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전날인 11월6일 증여주식 50만 주가 증시에서 거래됐다. 이때 천 회장은 기부와는 무관한 개인 지분 36만7198주를 끼워 팔았다. 가족들도 일제히 팔았다. 장남 소유의 32만7357주 등 세 자녀와 부인이 같은 날 동시에 매도했다. 이날 천 회장 가족이 판 주식 수는 모두 135만 주다. 배(사회 기부)보다 배꼽(가족 매도)이 큰 셈이다. 주당 매각 단가는 1만2700원으로, 천 회장 가족의 총 매도 금액은 171억4500만원이다.
뒤늦게 세중나모여행은 증여분을 합한 185만 주를 삼성증권을 통해 30여 기관투자자들에게 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매수·매도자가 가격·물량을 미리 정해놓고 정규장이 안 열리는 시간대에 매매하는 것)으로 팔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중나모여행은 “최근 정보기술(IT) 사업부문 분할을 발표하고 여행업에 전념하겠다는 회사의 의지가 기관투자자들의 호응을 얻은 것으로 분석된다”고 덧붙였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지분 매도를 앞두고 주가 부양을 위해 사업분할이란 재료를 활용했음을 자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중나모는 천 회장 가족의 지분을 매도하기 20일 전인 2007년 10월17일 IT와 여행 부문 사업을 분할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공시일 주가는 9950원이었는데 이후 가파르게 올라 11월5일 1만4천원을 찍었다. 13거래일 만에 주가가 무려 40%나 뛴 것이다. 주식 대량 매도는 그 다음날 이뤄졌다.
세중나모여행 관계자는 “우리 회사 주식을 저가에 사고 싶은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요청해 블록딜(대량매매)이 성사됐고,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장기 투자자 위주로 거래 대상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가는 11월5일이 연중 최고점이었으며 이후 하염없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또 장기 투자가라는 기관들 상당수는 한 달도 안 돼 주가 반등을 틈타 주식을 내다 팔았다. 12월4일 이명박 후보의 BBK 연루 의혹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증시에선 ‘이명박주’들이 꿈틀거렸다. 특히 세중나모여행은 천 회장이 이 후보와 대학 동기로 막역한 사이이며 고려대 교우회장을 맡고 있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상한가인 1만2400원으로 치솟았다. 이날 기관은 44만 주를 매도했다. 대부분 개인들이 받아갔다. 그 뒤로도 기관들은 태양광 사업 진출 등의 뉴스로 세중나모여행 주가가 반등할 때마다 주식을 처분했다. 2009년 5월8일 현재 종가는 5050원이다. 천 회장 가족이 판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천 회장은 주식 매각 대금의 일부인 30억원을 HK저축은행에 정기예금으로 넣었다고 말했다. 천 회장은 지난 4월24일 와의 전화 통화에서 “계좌에 있던 46억원 중 30억원을 HK저축은행에 5개월 만기(2008년 4월30일)로 정기예금을 했고, 이명박 후보가 이 예금을 담보로 30억원을 빌려서 한나라당에 특별당비를 내도록 편의를 봐줬다”고 밝혔다. 예금 만기를 역산해본 가입 시점은 대선이 임박한 2007년 11월30일이다. 이 후보는 사흘 뒤인 12월3일 특별당비를 냈다. 천 회장이 담보 대출 조건으로 요구했다는 이 후보 소유의 빌딩에 대한 근저당 설정 소요 기일을 감안하면 짜놓은 일정에 맞춰 긴박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주식 매각 대금이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천 회장은 지난 5월5일 고려대 개교 104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주식 매각 대금을 현금화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천 회장은 ‘현금화’란 용어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주식을 파는 자체가 증권의 현금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 회장은 주식 매각 대금이 계좌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와의 전화 통화에서 밝힌 ‘계좌에 있던 46억원’은 천 회장이 11월6일 판 주식의 매각 대금(1만2700원×36만7198주=46억6341만원)에서 증권거래세와 매매 수수료를 차감한 액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칼라일 출신 김병주는 박태준 회장 사위돈의 출처와 상관없이 천 회장은 왜 우량 은행이 아닌 저축은행에 거금 30억원을 예치했을까? 게다가 HK저축은행은 당시 감자를 할 정도로 적자 상태였다. 또 절친한 친구인 이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비싼 대출이자를 물어야 하는 저축은행을 왜 창구로 활용했을까? HK저축은행의 뒤에는 국내 인수·합병 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는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있었다. HK저축은행의 최대 주주는 에슐론이라는 유한회사다. 에슐론의 지분은 MBK파트너스가 100% 갖고 있다. MBK파트너스는 한국씨티은행으로부터 인수한 한미캐피탈을 대선을 앞둔 2007년 8월 우리금융지주에 되팔아 100%가 넘는 매각 차익을 실현하는 수완을 보이면서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 MBK파트너스의 회장이 한미은행 인수와 매각을 주도했던 김병주 전 칼라일 아시아 회장이다. 그가 바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위다. “박태준 회장과의 인연으로 현재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기에 80년대 중반 포항공대 부지 6만3천 평 기부와 더불어 이번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것”이라는 천 회장의 발언이 오버랩되는 이유다.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고 있던 5월7일 세중나모여행 관계자는 “최근 금융당국에서 조사를 나와 2006년 당시 세중여행의 코스닥 우회 상장에 관해 집중적으로 캐물어 다소 의외였다”고 말했다.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연결고리가 아닌 천 회장 개인 비리 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관측과 부합하는 대목이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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