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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후배의 손을 잡아주세요”


한국방송 기자가 보내온 글… “침묵과 냉소 떨치고 무대 위로 함께 올라갔으면”
등록 2009-01-08 13:29 수정 2020-05-03 04:25
입사 5년이 채 되지 않은 현직 한국방송 기자가 언론노조 파업에 동참하지 않는 선배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싣는다. 편집자

“한국방송 노조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2008년 9월3일 ‘한국방송 젊은 기자들’ 명의로 노조 규탄 성명을 낼 때만 해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타사 기자는 물론이고 기자가 아닌 친구들도 궁금해했다. 사장 선임 과정에서 공권력이 개입해 공영방송을 헤집어놨는데도 우리 노조가 침묵한 이유를 말이다. “언론사로서 자존심도 없느냐”는 말이 마주하는 이의 입에서, 또 수화기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지난 12월26일 언론 7대 악법에 맞서 문화방송을 비롯한 기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을 때 내 휴대전화는 조용했다. 아무도 “한국방송은 왜 동참하지 않느냐”고 따져묻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한국방송을 지켜본 이들이라면 다 안다. 한국방송 노조가 파업을 하는 게 오히려 ‘뉴스’라는 것을. ‘비판도 아깝다’는 듯한 싸늘한 시선에 마치 잘못을 혼내줄 부모가 없는 아이가 된 것처럼 참담했다.

이병순 사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9월3일, 한국방송의 젊은기자들이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에서 방송독립 쟁취, 이사회 해체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병순 사장 취임 직후인 지난해 9월3일, 한국방송의 젊은기자들이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에서 방송독립 쟁취, 이사회 해체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파업 불참 이젠 밖에서도 질책 안해

한국방송 노조는 왜 파업에 처음부터 동참하지 않았는가. 입사 뒤 선배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한국방송에는 영원한 주류도, 비주류도 없다”는 것이다. 정치 성향이 어떻든 30년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 번은 조직에서 ‘빛’을 본다는 거다. 30년 동안 정권이 몇 차례는 바뀔 것이고 그때마다 두 대의 엇갈린 롤러코스터를 타듯 조직 내에서 희비가 엇갈린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부침 없이 회사 생활을 하려면 튀지 말고 묻어가는 게 최선”이라는 전략도 넌지시 따라붙었다.

2008년 9월17일 회사가 탐사보도팀장을 지역 평기자로 내려보냈을 때, 절차를 무시한 ‘야밤 도둑 인사’ ‘보복 인사’보다 나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선배들의 ‘뒷담화’였다. “안타깝지만 정연주 사장 시절 누릴 거 다 누렸으니 내려올 때도 됐다”는 게 요지였다. 회사에 항의하자면서도 뒤에선 ‘롤러코스터론’을 펼치며 “법으로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는 이상, 정권에 따라 사장도 바뀌는 게 숙명”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선배들에게 왜 파업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도 정권 눈치 보느라 파업을 할 수 없다는 ‘숙명론자’들은 조금 낫다. 비겁하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파업 불참이 이성적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부류다. 지난 12월31일로 임기가 끝난 전임 노조 지도부처럼 이번 파업을 “문화방송 노조만의 밥그릇 싸움”으로 규정짓는 선배들은 오히려 파업을 하자는 후배들을 나무란다. 치기 어린 공명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며 문화방송의 자사 이기주의에 휘둘리지 말라고 다그친다. 이들에게는 한국방송 노조에 쏟아지는 비난과 문화방송 노조에 대한 응원은 모두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나 대기업과 재벌신문이 방송 시장에 진입할 경우 ‘공영방송’으로서의 한국방송의 경쟁력은 지키기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론을 돈 버는 ‘산업’으로만 규정하고 통제하겠다는 정권 아래서 수신료만 올리면 공영방송을 지켜낼 수 있다고 말하는 선배들의 생각은 순진한 발상이다. 그 좁디좁은 상황 인식 앞에는 문화방송 민영화 다음은 한국방송 2TV라는 공공연한 시나리오도 통하지 않는다.

기자 송년회와 여당 의원의 격려사

기술직 비중이 크기 때문에 한국방송 노조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선배들도 있다. 언론사가 아닌 한국방송‘공사’에 입사한 기술직 때문에 기자들의 운신 폭이 좁아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협회장이 바뀐 뒤의 최근 한국방송 기자협회를 보면 한국방송 ‘침묵’의 주범에는 기자들도 포함돼 있다. 사실상 폐지와 다름없던 탐사보도팀과 의 개편, 보도지침을 연상시키는 하향식 의사소통에 대한 기자들의 원성이 사내 게시판을 도배한 뒤에야 한국방송 기자협회는 성명서를 내놨다. “일련의 상황을 강력히 규탄한다” “적극 대응하겠다”…. 이런 문구에서 보이는 의지는 강력하지만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적은 거의 없다. “언론 7대 악법에 반대하고 파업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도 어김없이 냈지만 그뿐이다. 한국방송 몇몇 젊은 기자들이 대체휴가를 내고 참가한 파업 현장에서 정작 기자협회 선배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방송 기자협회의 생색내기용 ‘성명서 쇼’도 이제는 지겹다.

지난 12월23일 한국방송 기자협회 송년회에서는 안형환 의원 등 몇몇 한나라당 의원, 사장 후보로 올라 ‘이명박 코드인사’ 논란을 불렀던 김인규 전 한국방송 이사 등이 ‘왕림’했다. 한국방송 출신이라 후배들을 보러왔다며 긴긴 격려사를 했단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한나라당에 대한 기자협회 회원들의 성토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 믿고 싶다. 하지만 공영방송 기자들의 송년회 자리에 여당 의원이 참석했다는 것을 국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국회의원 배지를 단 선배들도 그렇다. “한국방송이 이명박 나팔이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마당에 후배를 격려할 자리가 기자협회 송년회밖에 없었는지 묻고 싶다.

결국 이번에도 젊은 기자들이 나서야 했다. 그러나 방송사 파업을 지지하고 대체휴가를 내고 참가하겠다는 젊은 기자들에게 한국방송 안의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쏟아낸 것은 우려·비판·비난이 다수였고, 기껏해야 응원이었다. 노조, 기자협회, 사원행동까지도 젊은 기자들을 빼곤 모두 관객이었다. 선배들은 후배 기자들에게 “이제 또 무엇을 할 거냐”며 드라마 다음회를 궁금해 하는 시청자처럼 팔짱 끼고 물을 뿐이다.

한국방송에 입사해 제일 그리웠던 것이 토론이었다. 토론에서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가감 없이 의견을 말하고 수렴하는 분위기만 있으면 된다. 토론을 해서 옳고 그른 걸 가려보자는 후배에게 같은 식구끼리 물어뜯지 말자는 선배의 말은 조용히 있으라는 말보다 더 위협적이다. 때로는 절망적이다. 이제부터라도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공영방송의 원칙을 세워나갔으면 좋겠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조가 바뀌는 공영방송, 기사 한 줄 쓰는데도 무의식중에 정권 코드에 맞춰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공영방송에 누가 수신료를 내겠나.

새 노조위원장의 다짐 실천되길

그동안 한국방송이 일궈낸 성과도 많다. ‘땡전뉴스’를 내보냈던 과거를 반성했고, 의미 있는 탐사보도도 해왔다. 이런 성과들은 정권의 코드에 맞춘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할 말은 한다’ ‘필요한 것을 보도한다’는 기자로서의 양심 문제를 고민한 결과다. 민주화 이후 우리 내부의 역량도 그만큼 자라왔다. 생각보다 많은 기자들이 파업을 지지하고 있고, 함께하자는 후배의 손을 잡아주고 끌어주는 선배도 없지는 않다. 나의 욕심은 모두 함께 뜻을 모으고 무대 위에 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조가 나서야 한다. 한국방송이 ‘정권 눈치를 보며 정권에 휘둘리는 방송’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노조가 나서야 한다. 지난 12월31일, 새해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강동구 노조위원장이 “2009년부터는 한국방송도 언론 파업에 동참하겠다”고 말하며 서울 여의도 집회 현장에 나타났다. “늦었다”는 사과도 덧붙였다. 그 미안함과 면목 없음을 지속성과 진정성으로 되갚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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