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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 변호사가 된 운동가, 새터민과 새 길을

등록 2007-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기약 없이 떠났던 길로 다시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모습도 조금은 변했다. 운동가였던 전성(49)은 이제 변호사다.
그는 개업하자마자, 대북 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부설 법률지원센터인 ‘우리 동포’를 열었다. 국내에 정착하고 있는 북한 이탈 주민(새터민)과 재외 동포들을 위한 무료 법률 활동이 목표다. 한때 같이 운동했던 동지이자 친구인 이용선(50)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과도 다시 같은 방향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그의 삶은 과거의 연속이다. 1977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첫 옥살이를 한다. 80년엔 광주항쟁 관련 학생 데모를 하다가 붙잡혔다. 노동운동에 한창 빠져 있던 91년 말엔 ‘한국 사회주의 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한사노)에 연루돼 구속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정권 내내 탄압받은 셈이다.

그는 93년 시민운동가로 변신한다. 이듬해까지 경실련에서 기획실장을 지냈다. 체제 내 온건 합리적 개혁 노선을 따른 것이다. 그와 길이 달랐던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과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은 진보정당 건설의 길을 갔고, 불완전하지만 그 꿈을 일궈냈다.

그는 사단법인 ‘경실련 통일협회’의 연구실장을 맡으면서 ‘북한’과 첫 인연을 맺게 된다. 94~95년엔 남북경협 프로젝트를 맡아 중국 옌볜대 민족연구소에 머물렀다. 하지만 돌아와서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경실련으로도, 정치권으로도 끼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는 97년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데 유용하면서도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2004년에서야 합격했다.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시기였다. 그사이 지인들의 신청으로 그는 광주 민주화 항쟁의 유공자가 된다. 이때 나온 돈 덕택에 공부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사법연수원에 있으면서 통일법학회에서 활동했다. 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법률가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미약하지만 구체적 실천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변호사로선 선배들이지만 함께 운동했던 후배 이홍주·정진욱·김옥수 등 셋이 그와 함께 간다. 그의 광화문 사무실엔 신영복 선생이 손수 써준 ‘법고창신’(法古創新)이 걸려 있다. 그의 각오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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