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정년퇴임식하고 담양에 정착하는 한국학자 베르너 삿세교수…“보이는 게 다 연구자료” 즐거운 비명… 번역하며 내방가사 수집 중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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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절모를 쓴 신사가 식당에 앉자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이 비빔밥과 막걸리를 주문하자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막걸리로 곡기를 채운다”고 한다. 한참 기다린 끝에 비빔밥의 나물과 명란이 나오자 명란에 관심을 보인다. “명란에 기름장 말고 뭐가 섞인 것 같아요”라면서 종업원에게 ‘부재료’를 묻자 “그것은 주방의 비밀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다”는 말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막걸리 안주로 주문한 삼겹살에 딸린 된장을 보면서 “옛날에는 집집마다 된장 맛이 달랐는데…” 하면서 장독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아인스바인보다 장충동 족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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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중절모 신사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우리 전통음식 애호가쯤으로 여길 법하다. 아니면 유년시절의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놀랍게도 중년 신사는 지난해 9월 말까지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유럽한국학협회장을 역임한 베르너 삿세(66) 교수다. 마치 고향의 음식을 자랑하듯 한국 요리에 대한 상찬이 계속 이어진다. “독일에는 돼지 족발을 간에 맞춰 삶은 ‘아인스바인’이라는 요리가 있어요. 그런데 장충동 족발이 훨씬 맛있어요. 기름기를 없애서 담백한 것은 물론이고 향기까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삿세 교수는 함부르크대에서 정년퇴임식을 마치자마자 ‘한국행’을 서둘렀다. 모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라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이주학자’로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몸은 독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서울에 있었다”는 말이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으로 한국 언론 사이트를 뒤적이고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기본으로 가르쳤다. 한국학을 ‘본토’에서 연구하려는 학자로서의 열정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도 한국을 목말라했다. 기와집에서 지내는 즐거움을 아는 그였다. “기와집만큼 사람의 기운에 잘 맞는 건축은 드물어요. 지붕 처마 곡선이 아름다우며 냉난방 기기 없이 더위와 추위를 견디도록 합니다.”
어쩌면 삿세 교수는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서 ‘객지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40여 년 전인 1966년이었다. 당시 그의 장인은 전남 나주의 호남비료공장에서 기술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장인이 자신의 이름을 딴 ‘호만에움’을 세우면서 사위 가족을 불러들인 것이다. 갑작스럽게 20대 중반에 부인, 두 딸과 함께 나주에 둥지를 틀고 기술학교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서 전북 익산의 원광대 부설 기술학교, 전남 여수의 기술고등학교 등지에서 ‘선진 기술’을 전파했다. 그렇게 5년여를 보내는 사이에 쌍둥이 아들 등 식구도 늘었다.
“마을에 계신 어른들이 딸 둘을 보면서 남동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서운하겠네요’라고 말하더군요. 그것이 한국 정서라는 것을 알았어요. 남자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남자 쌍둥이를 낳았어요. 이를 어른들에게 장난스럽게 ‘자랑’하던 기억이 나네요.” 삿세 교수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아이’를 입양해 모두 8남매를 키웠다. 그가 입양한 한국 아이는 1973년 입양할 때 15살의 혼혈아였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냉대와 차별을 받아야 하는 아이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는 중년이 된 아들은 ‘양부’의 한국행을 적극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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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을 달리듯 빠져든 한국학
이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은 삿세 교수는 1970년 독일로 돌아가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이미 직업 교육을 마치고 남을 가르칠 정도의 기술을 습득한 뒤였다. 순전히 한국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가장의 책무를 잠시 미루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학업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한국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때였던 탓이다. 수소문 끝에 보훔대 아시아문화센터에서 일본학과가 개설되어 한국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나이 서른에 대학에 입학해 가슴에 새긴 한국을 학문으로 새롭게 만났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늦깎이 대학생은 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내달리는 차만큼이나 빠르게 한국학에 빠져들었다. 대학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는 데까지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1975년 독일인으로선 처음으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의 제목은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방언’. 국내에서도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분야를 독일에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한국 생활을 하면서 한글을 터득하고 한·중·일 관련 강의를 들으면서 한문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중세로 쉽게 들어갔어요. 독일에 한국학자가 드물다 보니 대학에서 자리잡기도 수월했어요.”
이렇게 삿세 교수는 기술 강사에서 한국학자로 변신해 독일에서 한국학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학위를 받자마자 부교수로 임용됐고, 일본학과에 ‘더부살이’ 신세를 하던 한국학과가 ‘딴살림’을 차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시행되던 교수자격 국가시험인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을 통과해 한국학자로서 드물게 ‘닥터 하빌’(Dr.habil)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1988년 보훔대 한국학과 정교수로 임용돼 한국학 전파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뒤 1992년 함부르크대에 한국학과가 개설될 때 자리를 옮겨 연구에 몰두했다.
그동안 삿세 교수는 한국학자로서 두드러진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널리 알려진 게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가사인 (月印千江之曲) 제1권 194연을 같은 대학 안정희 교수와 함께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다. 지난 2002년 출간된 독일어판 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었다. 번역과 함께 중세 국어의 어휘·어법 등 언어학적 연구 성과를 망라한 저서였다. “세종대왕이 언어학자이자 시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어요. 석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적으로 풀어낸 은 생동감 있는 언어와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범어까지 익히며 번역
이런 평가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얹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애당초 세종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국내에서 몇 권의 주해서가 나왔지만 한문과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흔히 범어(梵語)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표기한 자료를 기초로 이 쓰였다. 삿세 교수는 의 한자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따로 공부했다. 이를 통해 한자의 개념을 파악해 독일어판의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 예컨대 ‘도솔천의 가르침’에서 석가의 이름이 여럿인 것은 가르침의 대상마다 다른 이름을 사용한 때문이었다.

“시의 내적인 구조까지 파악하면서 번역하느라 독일어판을 펴내는 데 5년이 걸렸어요. 그냥 번역만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펴낸 주해서는 어려운 부분을 빼고 다뤄 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어요.” 이런 강렬한 학문적 열정으로 삿세 교수는 유럽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마련하는 등 한국학 연구의 ‘허브’ 구실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한국학 연구의 갈증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 한국 밖에서 이뤄지는 그의 연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상적인 학문적 교류와 연구 활동을 생각하다 보니 독일에서의 ‘유배생활’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해 정년퇴임식을 마친 삿세 교수는 여행가방에 이삿짐을 꾸리는 것으로 독일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결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페인과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8남매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한국행을 성원했다. 서로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5년 전 이혼한 부인이 간섭할 리도 없었다. 그야말로 홀가분한 한국행이었다. 이미 30여 년 전부터 외로이 한국 땅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도 있었다. 전남 나주에서 지내던 장인은 1978년 독일에 일시 귀국해 여행을 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는 장인의 유골함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나주에 묻기도 했다.
“나에게 한국은 학문 연구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고향이기도 합니다. 한국과의 오랜 인연으로 전국 어디에든 친구들이 있어요. 무엇보다 한국학자로서 연구할 게 무궁무진해 행복합니다.” 요즘 삿세 교수는 독일인 친구가 지내던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옥을 임시거처로 쓰고 있다. 그곳에 지인이 찾아오면 페퍼민트 차를 권한 뒤 분위기가 오르면 차에 약주를 타서 마시기도 한다. 차와 약주가 섞인 ‘삿세식 폭탄주’인 셈이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거나 화선지에 시화를 그린다. 송강 정철의 권주가인 (將進酒辭) 한 대목을 쓰고 신문지를 오려붙인 그림은 예사 솜씨가 아님을 확인케 한다.
‘이주’했으나 손에 든 건 ‘관광비자’
그토록 풍류가객 정철에 빠진 때문일까.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를 암송하는 삿세 교수는 오는 4월 전남 담양군 참평마을의 고씨 종가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현지 사정에 밝은 지인의 주선으로 넓은 터를 자신이 키우는 삽살개 ‘장군이’와 함께 쓰려고 한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관리가 잘되어 특별히 고칠 게 없어요. 창고를 욕실로 개조하면 사는 데 불편하지 않아요. 본채를 작업실로 사용하며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내방가사 자료를 수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도 가사를 지어 부르는 분들이 많이 있더군요.”
이미 삿세 교수는 여러 편의 내방가사를 모았다. 그가 내방가사 자료를 모은다는 말을 듣고 이웃 주민과 스님 등이 보내준 것이다. 그저 사람을 만나는 게 연구활동의 연장이라 하겠다. 독일어판으로 해외 한국학의 영역을 중세국어로 확장한 그가 이제는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았던 내방가사의 진면모를 드러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구결과 이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통사회를 분석할 계획도 세웠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게 연구자료인 까닭에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나날이다. 요즘 그는 틈틈이 번역을 하면서 숨을 고르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삿세 교수. 그는 한국으로 ‘이주’를 했지만 ‘관광비자’를 받아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을 떠나야 한다. “잠깐씩 나가 중국이나 일본 등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아요”라며 여유를 부린다. 하지만 독일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도 전 부인과 나눠야 하는 처지라 대학부설 연구소나 단체에 속해 ‘취업비자’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다. 늦은 밤 서울 명동에 있는 라이브 통기타 카페 ‘섬’에서 한국에 푹 빠진 독일 할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다. 그곳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아이리시 팝 나 한국 가요 등을 부르는 외국인이 있다면 삿세 교수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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