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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찬] 무너져도 다시 쓰는 만인보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경기 평택 대추리에 가면, 이제는 곧 허물어질 마을 담장마다 깨알같이 쓰인 문인들의 시를 읽을 수 있다. 대추리 옆 마을인 평궁리에 사는 류외향(33) 시인과 서수찬(44·사진) 시인이 대추초등학교 건물 한켠에 각각 ‘빈들’과 ‘대추리 만인보 1’를 쓴 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추리 담장은 이곳을 다녀간 시인들이 써내려간 시의 흔적들로 빼곡하다.
이 가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불러모으는 것은 서수찬 시인의 연작시 ‘대추리·도두리 만인보’다. 그는 “고은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만인보’를 쓰는 것이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우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다. 평소 주민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서 시인의 묘사를 보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시는 꼼꼼한 주민 관찰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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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인은 대추리 김순득 할머니의 주름살을 보고 ‘말라버린 황새울의 물줄기’를 떠올리고,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원회’ 김택균 사무국장의 듬직한 모습에서 ‘홀로 남아 무너져가는 집을 버티고 선 서까래’를 떠올린다. 그가 대추초등학교 벽에 쓴 최관식 할아버지에 대한 첫 번째 시는 5월4일 정부의 행정대집행으로 무너져버렸다.

서 시인이 대추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올해 1월부터다. 평택 도두리가 고향인 가수 정태춘씨가 주도해 만든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주민 주거권과 생존권 옹호를 위한 문예인 공동행동, 들 사람들’에 참여하면서 대추리 일꾼이 됐다. 5월11일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 앞 촛불집회장에서 만난 시인은 “이 싸움은 단순한 주민 생존권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후 우리 한반도의 평화 문제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죠. 우리와 미국의 관계를 봤을 때 기지가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지 전쟁에 끌려다녀야 합니다.”

그의 ‘만인보’는 14편까지 완성됐다. 아마도 그의 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시는 국가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저지른 죄악에 대해 고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흉기’가 되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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