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노무사님, 검정고시 또 쳐요?

등록 2006-05-18 00:00 수정 2020-05-03 04:24

초졸 학력으로 택시 몰다가 노동법 전문가가 된 구건서씨의 끝없는 도전… 법학학사와 경영학 석사까지 노리며 노동자 위한 종합 컨설팅회사 구상중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네 이름 있다더라.” 전화기 저쪽의 한마디는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했다. 부부는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영문도 모르는 초등학생 아들도 덩달아 울었다. 중학교 중퇴 학력의 구건서(49)씨가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1989년 9월, 시험 준비에 나선 지 4년 만이었다. 당시 총무처에 친분 있는 사람이 있어 노동부 친구를 통해 알아봐준 덕에 정식 발표 이틀 전에 합격 사실을 알았단다.

학벌사회의 냉담함에 좌절했지만…

광고

“1회 노무사 시험이 1986년에 치러졌는데, 그 뒤 3년간 시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무사 시험이 폐지된다는 얘기가 돌고, 중도에 시험을 포기한 이들도 많았어요.” 1989년 2회 시험의 최종 합격자는 구씨를 포함해 모두 24명이었다.

1회의 110명 안팎보다 훨씬 적은 수여서 그의 감격은 더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생스럽던) 옛날 생각 많이 났죠. 집사람에게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농장·공사장의 잡부, 화장품 외판원을 거쳐 택시 운전을 하던 구씨가 꿈에 그리던 노무사 시험에 어렵사리 합격했어도 당장 무슨 뾰족한 수가 난 건 아니었다. 탄탄대로는커녕 ‘학벌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히는 좌절감부터 맛봐야 했다. 시험 합격 이듬해 서울 강남구청 근방에 노무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일감을 좀처럼 딸 수 없었다. “기업체 자문을 맡으려고 하면 꼭 약력을 요구하더군요. 약력을 보내고 나면 아무 연락이 없고….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겁니다.”

광고

학벌의 높은 벽을 느낀 그는 1991년부터 사법시험 도전에 나서게 된다. “사시를 준비한 것은 꼭 학벌의 벽을 넘자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무사 자격으로는 법적 소송을 맡을 수 없어 고객에게 토털 서비스(일괄 서비스)를 할 수 없다는 고민도 있었어요. (택시를 운전하는 틈틈이 공부한 것만으로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데 따라) 자만심도 있었고.” 사시 도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듬해까지 연속 쓴잔만 마셨다. 그 뒤 뛰어든 사업에서도 잇따라 실패하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는 아내가 대신 꾸려가야 했다.

그러던 구씨가 노무사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계기는 1996년 노동법 전문 서적인 <노동법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펴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낸 첫 단행본이었던 이 책은 1995년 1월부터 노동 전문잡지 <노동법률>에 연재한 ‘실무자를 위한 노동법 강좌’, <현대노사> <매일노동뉴스> <노동교육> 등 노동 관련 잡지에 기고한 글을 엮은 자료집이다. 그는 이를 통해 노동법 전문가라는 평을 얻었고, 학벌의 벽을 조금씩 넘을 수 있었다. 구 대표의 열린노무법인으로 사건 수임과 자문 계약이 잇따라 들어오고, 기업체나 노동단체의 강의 요청이 많아졌다. 많을 때는 한 해 300회의 노동법 강연을 한 적도 있으며, 지금도 200회가량 강연을 하는 인기 강사다.

뜻밖의 기회가 된 ‘노동법 날치기’

국내 정치사에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1996년 12월26일의 ‘노동법 날치기 파동’ 또한 그에겐 뜻밖의 기회였다. 날치기 노동법에 대한 해설서 발간 작업에 누구보다 일찍 뛰어든 게 그였다. 노사 관계 실무자들에게 알기 쉬운 노동법 해설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보름 정도는 하루 2시간만 자면서 원고 작업을 강행해 날치기 통과 18일 만에 700쪽 분량의 <개정 노동법 해설>을 내놓게 된다. 이 해설서는 날치기 노동법 해설서로는 유일하다. 정치권에서 날치기법을 재개정하기로 합의하면서 다른 집필자들은 모두 중도에 손을 놓았던 것이다. 날치기 노동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개정되면서 해설서의 운명도 다하지만, 구 노무사는 이를 바탕으로 재개정 노동법 해설서를 누구보다 빨리 내놓음으로써 노동법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광고

그가 노동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택시운전 기사 시절(1983~89)부터였다. “노동운동을 의식적으로 한 건 아니고 (근무) 교대하는 친구들이 같이 하자고 해서 따라 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동법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는 나중에 노무사 시험에 도전하는 실마리가 됐다.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게 된 건 노조활동의 한계도 느꼈고 택시 운전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는 자각도 들어서였습니다. 노동법을 심층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죠.” 이즈음 읽은 미래학자 존 네이스비츠의 <메가트렌드>는 그에게 지식과 학습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택시 운전을 하는 틈틈이 공부를 해야 할 처지에선 시간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당시 회사 택시 업무는 낮과 밤을 번갈아가며 교대하는 방식이었는데, 회사 쪽에 부탁해 낮에만 일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수입은 뚝 떨어졌다. 사납금만 채우고 20만원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근무는 정해진 8시간만 했다. 이는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인 동시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좋아하던 당구와 술을 끊은 게 이즈음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몽땅 공부하는 데 투자했죠. 학원 강의를 들을 처지가 못 되니 방송대 교재를 갖고 다니며 택시 안에서 틈틈이 인사관리와 노동법을 공부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택시 안에서도 쉽게 책을 볼 수 있도록 낱장으로 뜯어 작게 만든 상태로 핸들에 붙여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들여다보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어두울 때면 책 부분을 비춰줄 수 있게 별도로 스위치를 달기도 했다.

중학교 중퇴 학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노무사로 웬만큼 자리를 잡은 듯 보이는데도 구 대표는 여전히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8월 중졸 검정고시를 마친 데 이어 올 4월9일에는 고졸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선(60점)을 훌쩍 넘는 평균 85.37점을 받았다. 구 대표는 올해 중 학사고시 제도를 통해 법학학사 학위를 따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법학 35학점을 따 학사 학위를 받으면 올해부터 바뀐 제도에서도 사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구 대표는 이어 내년엔 경영학 석사에 도전할 뜻을 품고 있다. 경영학 공부를 하려는 건 “노사 문제가 법만으로 풀 수 없고 개인과 조직을 통합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비정규직 법안, 일단 통과시켜야”

노동법 전문인 그에게 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았더니 “일단 통과시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금지 제도만이라도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는 게 차선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계, 노동계를 고려해가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한 법안입니다. 미흡한 게 사실이지만, 이 법마저 없어지는 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별금지 제도가 처음부터 100% 만족스럽게 시행되지는 않더라도 3~5년 안에 똑같은 일에는 똑같은 대우와 임금을 받는다는 희망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명이었다. 구 대표는 “차별금지 제도는 노동부의 ‘의지’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열린노무법인 대표, 중앙인재개발원·중앙노사교육원 원장으로 일하는 구 대표는 “변호사, 노무사, 회계사 업무를 통합해 기업에 필요한 서비스를 일괄 지원하고 노동자들의 교육·훈련·임금 체계에 대한 자문까지 아우르는 컨설팅 회사를 구상 중”이라고 했다. 여기에 국제 인수·합병(M&A) 업무에까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구 대표의 도전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