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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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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겨울, 경성을 찾아 나서다

등록 2006-01-05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종로타워로 바뀐 화신백화점, 조경시설로 전락한 황궁우 등 경성의 흔적을 찾아…구보씨의 발자취는 남아있건만 서울은 왜 그렇게 빨리 옛모습에서 멀어지는가</font>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가수 패티 김이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로 시작하는 <서울의 찬가>를 부른 것은 1967년 봄이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둘째권에서 “그 시절 서울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가사 그대로 종은 울리고 꽃은 피어 아름다운 내일을 예고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1965년 치욕적인 한-일협정으로 산업화의 종자돈이 들어왔고, ‘불도저’ 김현옥은 서울 시내를 파헤치고 있었으며,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 정책이 서서히 ‘약발’을 받고 있었다.

경성의 월스트리트, 남대문로

가파른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서울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그렇지만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잘게 파편화돼 겨우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지 못한다. ‘경성 만보객’ 구보(소설가 박태원)씨가 경성 거리를 헤매기 시작한 것은 1934년 8월1일부터다. 그는 몽양 여운향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1934년 8월1일부터 9월19일까지 연재했다. 왕조의 몰락·식민지배·전쟁·가파른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도시는 너무나 빨리 변했다. 도시학자 조이담씨가 지난해 11월에 출간한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에서 지적했듯 “구보씨가 발과 글로 남긴 ‘근대’의 자취와 지금 우리의 ‘현대’가 청계천 다리 끊어지듯 서로 소통 불능 상태라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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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박태원의 집은 옛 광통교 너머 청계천의 남쪽 변인 경성부 다옥정 7번지였다. 그의 집터는 청계천 복개와 도로 확장, 도심재개발 사업 등을 거치면서 물길과 도로 등으로 변해 자취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집의 3분의 2는 새로 개발된 청계천에, 3분의 1은 그 위 아스팔트에 걸쳐 있다. 그 앞에 LG다동빌딩과 한국관광공사 건물이 버티고 서 세월의 무상함을 비웃을 뿐이다.

구보의 여행은 ‘그 집’에서 시작된다. 대문을 열고 나와 청계천과 마주한 구보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통교 쪽으로 향한다. 광교 네거리에서 그는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리를 지나 종로 네거리에서 멈춘다. 그가 광교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대문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광통교를 건넌 구보씨는 별 볼일도 없이 친일 자본가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안으로 들어선다. 화신 터를 지키고 있는 건물은 삼성증권이 사용하고 있는 33층(135m)짜리 종로타워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기둥에 스카이라운지를 얹은 선진 건축기법이 화려하긴 하지만, 역사의 거리 종로에 들어선 건물치고는 다소 우악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대 최고의 조선 건축가 박길룡(1897~1943)의 설계로 지어진 화신과 장안의 화제였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5년에 만들어진 ‘서울상계약도’는 화신백화점을 그저 ‘화신’이라 칭하고 있다. 화신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시대의 대명사였다.

문학작품이 배경이 된 미쓰코시백화점

백화점 밖으로 나온 구보씨는 보신각 네거리에서 전차를 잡아탄다. 전차는 1966년 자취를 감출 때까지 서민들의 편한 발 역할을 했다. 구보 시절 전차 기본요금은 서민들이 즐겨 피우던 ‘마코’ 담뱃값과 같은 5전이었다. 종로에서 동대문 오간수문을 돌아온 구보의 전차 여행이 끝난 곳은 지금의 한국은행(옛 조선은행) 건물 앞이다. 일제시대 조선은행 앞 남대문로는 상업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현 롯데백화점)·일본생명·광통관(우리은행 종로지점) 등이 밀집해 있던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조선은행 동쪽에 있던 옛 경성우편국 터는 서울 중앙우체국 신청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그 건너편의 조선저축은행(현 조흥은행 제일지점)과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신세계백화점 본점)은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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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자본을 상징했던 ‘화신’만큼 1930년 문을 연 미쓰코시백화점도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됐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열다섯 살 된 애첩 춘심이가 “란찌(런치)를 먹으러 가자”고 윤직원 영감을 꼬신 곳이 이 건물 앞이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뚜우’ 하는 정오 사이렌을 들고 “한번 날아보자”고 결심한 곳은 이곳 옥상이며(<날개>), 스물한 살 처녀 박완서가 미군 초상화를 그리며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받아내던 화가 박수근을 만난 곳(<나목>)은 이 건물 안이다. 건물은 현재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어서 들어가볼 수 없다.

조선은행에서 구보는 소공동길을 따라 지금의 서울광장을 향해 길을 잡는다. 소공동길의 옛 이름은 조선 2대 총독 하세가와의 이름을 딴 장곡천정(長谷川町·하세가와마치)이다. 고종은 1897년 이곳에 천단을 쌓고 ‘자주국’ 대한제국의 출범을 고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가 그 천단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2월에 원구단 일대의 토지 6750평과 건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원구단의 석축을 헐어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조선호텔을 지었다. 북쪽의 남은 땅에는 총독부 도서관을 지어 원구단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했다. 소설가 박완서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복순이와 처음 찾은 도서관이 바로 여기다. 그러나 총독부 도서관에는 어린이 열람실이 없어 박완서와 복순이는 소공동길 너머 경성부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조선호텔 건물은 1967년에 헐렸고, 그 터에는 신세계 소유의 웨스턴조선호텔이 들어서 있다. 호텔 건물 속에 둘러싸여 조경 시설로 전락한 황궁우에서 까닭 없는 서글픔이 느껴진다.

구보씨의 발걸음은 경성역에서 종로로 이어지고 저녁 무렵이 돼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다방으로 향한다. 둘은 설렁탕을 먹고 잠시 헤어졌다가 밤 10시쯤에 다시 만난다. 둘은 “가벼운 바람이 상쾌한 여름 밤”으로 나가 술집을 전전하다 새벽 2시를 맞는다. 이상은 구보에게 “좋은 소설을 쓰라”고 말하고, 구보는 “내일, 내일부터 창작하겠다”고 답했다. 소설은 그것으로 끝이다. 월북한 박태원을 따라 잊혀졌던 소설이 1988년 7월 해금됐을 때 서울은 그 옛날 서울과 다른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1926년 10월30일 오전 10시 경성부청(서울시청) 준공식 날 사이토 총독 이하 내빈 1천여 명이 청사 옥상에 모여 바장조 4분의 4박자의 경성부가를 부른다. 가사는 “한양의 옛 터전에 반도의 영광스런 도시, 우리는 경성의 부민 영겁의 행복을 기뻐하는, 오~ 대경성”으로 장중하게 이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에는 목재·시멘트 등의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0년대 중반까지 서울은 전쟁의 폐허를 다 지우지 못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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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도로는 철거 막을 방법 없다”

소설가 김승옥이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을지로 3가의 간판 없는 한 술집에 미자라는 이름을 가진 색시가 다섯 명”이라고 말했을 때 서울의 인구는 350만여 명이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고 삶에 희망은 없었다. 그 뒤로 ‘프리랜서’ 성매매 여성 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가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1966)가 나왔고, 그해 10월15일 세운상가 일대의 재개발 지구 지정으로 서울은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수 조용필이 조국의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을 위해 <서울 서울 서울>을 부른 것은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로부터 겨우 22년이 지난 1988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지나 ‘한류 스타’ 보아의 <서울의 빛>이 세상에 나왔다. 보아가 2003년 서울시청 앞 ‘Hi Seoul 페스티벌’ 무대 위에서 “저 찬란한 햇살처럼 빛나는 꿈들을 따라서 날아간 내일은 눈부시다”고 노래했을 때, 5월의 봄볕은 아직 잔디로 뒤덮이지 않은 시청 앞 광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지난 3년 동안 서울 초동 스카라극장 정면, 명동 옛 대한증권거래소 건물, 종로구 부암동 현진건·이광수 고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건물 등 등록문화재로 지정됐거나 지정될 예정인 건물들이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지금 제도로는 건물 철거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은 점점 옛 모습에서 멀어지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별로 슬퍼하는 것 같지 않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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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객이 활개치는 도시로</font>

시민들의 호응 얻는 서울시의 ‘걷고 싶은 도시’ 조성 작업

서울시는 그동안 서울을 ‘걷고 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04년 5월 개장된 시청 앞 ‘서울광장’이다. 광장 건설 과정에서 애초 설계공모에서 당선된 ‘빛의 광장’안을 제멋대로 바꿔 뒷말이 무성하기도 했지만, 서울광장 개장으로 서울의 보행 환경이 좋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07년 이후 100년 만에 시민의 품에 돌아온 숭례문 광장(5월 개장)도 시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서울시는 앞으로 광화문 앞에도 1700평 크기의 광장을 새로 꾸밀 예정이다.
2004년 이후 서울의 국중대로인 광화문~시청 앞~남대문 사이의 보도 너비도 크게 넓어졌고, 이 구간에 전에 없던 횡단보도 16개도 새로 설치됐다. 이전까지는 동아일보 앞에서 동화면세점으로 건너거나 덕수궁 대한문에서 서울광장 쪽으로 움직이려면 지하도를 이용해야 했지만 이제는 횡단보도를 건너기만 하면 된다.
이 때문에 서울의 보행 환경에 대한 시민의 만족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지난 11월28일 녹색교통운동이 서울시민 1531명을 대상으로 ‘보행환경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만족도(100점 만점)가 56.8점을 기록했다. 지난 1998년(47.0점)과 2000년(49.7점) 조사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다.
서울시는 21세기 ‘경성 만보객’들을 위해 7개의 도보 관광코스를 운영 중이다. 코스에는 근대문화 중심지인 △덕수궁·정동, 전통문화 중심지인 △경복궁·인사동 △종묘·창경궁 △북촌·운현궁, 쇼핑 중심지인 △남대문·명동 젊음의 거리 △대학로 △청계천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시 관광과(02-3707-9453)나 광화문관광안내소(02-735-8688)에서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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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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