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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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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과 살을 섞고 싶다

등록 2005-08-05 00:00 수정 2020-05-03 04:24

세곡선 수백 척과 번잡한 장터를 가졌던 서울 마포의 옛 포구
병인박해의 비극 새긴 ‘양화진 성지공원’ 열며 새롭게 회복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양화진은 이미 사라진 옛 포구의 이름이다. 추수가 끝난 뒤 충청·전라·경상·황해의 세곡선 수백척이 강화도 해협으로 몰려들었고, 거기서 한강으로 진입해 양화진을 지나 경창(정부 창고)이 있는 서강이나 용산에 정박했다. 양화진은 강화도의 방비를 책임지는 후방 기지였고, 전국 8도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한데 살을 섞는 번잡한 장터이기도 했다. 소설가 김훈은 지난해 펴낸 <자전거 여행> 둘째 권에서 전쟁으로 수명이 끝난 포구에 기대 살고 있는 늙은 어부의 서글픔을 서늘하게 노래했다.

양화진이 한때 포구였다는 사실은 ‘진’(津)이라는 이름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1968년 2월10일 오후 3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포구 건너편의 밤섬을 폭파했을 때 늙은 포구는 육지 속에 파묻히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절두산의 비극을 아십니까

전쟁과도 같았던 여의도 윤중제 공사가 110일 만에 끝났을 때, 서울시는 87만평의 택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보험사와 증권사·방송사·아파트가 들어서 휘황찬란한 밤을 밝히고 있다. 이준범 마포구 양화진복원팀장은 “양화진 성지 공원의 중간쯤에 옛 나루터가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고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라진 포구에서 바라본 한강의 숨결은 낮고 또 넓다. 사람이 강물의 흐름은 바꿀 수 있지만, ‘흐름’ 그 자체에는 손댈 수 없을 것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용산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5㎞의 강변에 46개의 정자를 지어놓고 술 마시며 놀았다. 조선 연산군 때 성희안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다 “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聖心元不愛淸流)라고 읊었다가 이조참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시대 역사서 <한경지략>을 보면 “양화진은 경치가 좋아 명나라 사신들이 매일 그곳에 나가 놀며 시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1925년 터진 을축 대홍수와 이후 계속된 한강 개발로 옛 모습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제2한강교(양화대교)와 당산철교를 타고 강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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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철교는 옛 양화진을 사정없이 둘로 가른다. 한강을 등지고 합정동쪽을 보고 섰을 때 오른쪽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위해 만든 ‘절두산 순교 성지’이고 왼쪽에 자리한 것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이다. 두 공원은 한때 쓰레기 처리장에 의해 차단돼 있었지만, 서울 마포구가 39억원의 돈을 들여 양화진 성지공원을 꾸며 5월20일 문을 열었다. 7월28일 가는 비를 맞으며 둘러본 공원은 이따금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조선 왕들은 사람이 자주 오가는 이곳 나루터에서 큰 죄인들을 모아놓고 목을 쳐 죽였다. 멀리 올라가면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의 우두머리 윤임의 목이 달아났고, 가깝게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주검이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가장 잔혹한 비극은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다.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정책을 돌연 바꿔 혹독한 탄압에 나섰다. 나루터 옆에 우뚝 솟은 잠두봉(누에의 머리 모양을 닮은 봉우리)이라는 작은 봉우리는 한순간에 절두산(사람의 목을 자른 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게 됐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2003년 펴낸 <절두산 순교 성지 이야기>를 보면 “병인박해 때 전국에서 8천여명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가운데 절두산 순교자들은 177명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었다. 책은 이어 “기록으로 확인되는 절두산 처형자 29명 가운데 최수·김인길·김진·원후정·성연순은 배교했다”고 못박았다. 그들은 아마 순교자의 칭호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순교와 배교, 순결과 치욕이 겹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눈물겹고 아프다.

11월까지 산책로에 쉼터도 만들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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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가로질러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으로 건너가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를 참배할 수 있다. 언더우드(연희전문 설립자), 헐버트(고종의 헤이그 밀사), 셔우드 홀(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제작자), 아펜젤러(배재학당 설립자), 어니스트 베델(<대한매일신보> 창간자)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 가운데 헐버트(독립장)와 베델(대통령장)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헐버트의 서훈은 1950년 3월1일에 이뤄졌는데, 독립운동가에 대한 본격적인 서훈이 시작된 것은 1962년부터다. 이승만 박사의 특별 배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마포구는 양화진 성지화 사업을 위해 지하 주차장(131대)과 양화진공원 지하차도를 만들어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서울시와 마포구는 11월까지 한강시민공원 안에 산책로와 피크닉장(쉼터)을 만들고, 양화로 진입로(서울 신석초교~서울화력발전처)는 넓힐 예정이다. 10월에는 ‘잠두봉 선착장’이 만들어져 한강 유람선이 쉬어가게 된다. 사라진 늙은 포구는 그렇게라도 새 생명을 찾고 싶었나 보다.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우리 근대사의 살아 있는 학습장인 양화진 성역화 사업을 위해 전 국가적인 지원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근현대사가 압축된 곳"
[인터뷰/ 박홍섭 마포구청장]

소설 <양화진> 읽고 성역화 나서… 국가가 나서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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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포 토박이다. 한때 이름 높은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웃는 모습이 선해 보이는 그의 현재 직업은 구청장. 박홍섭(63) 마포구청장은 “젊은 시절 노동운동가로 현장을 누볐을 때 구청장을 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젊은 직원들은 내가 노동운동 1세대였다는 사실을 모른다”며 웃었다.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과 신홍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등이 한때 노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1985년 7월31일 한국노총 중간간부 해직 동기다. 그는 “마포와 같은 주거지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과 복지, 양화진 같은 문화공간”이라며 “남은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 다시 한번 구민들의 선택을 받겠다”고 말했다.
양화진 성역화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난 마포 토박이다. 예부터 동네의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995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정연희의 <양화진>이라는 소설을 읽었고, 이곳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구청장이 되고 나서 2002년 8월에 절두산 성당에 들러 김수창 주임신부를 만났을 때 “성지화 사업을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양화진 성지화가 마무리되면 디자인 고등학교(옛 동도공고) 터에 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 복원에도 나서고 싶다.
양화진의 역사적 의미는.

양화진 자체가 교통의 중심지였다. 외국 선교사들이 강화도를 통해 기선을 타고 들어오면 양화진에서 상륙해 나귀를 타고 도성으로 들어왔다. 면적은 좁지만 한국 근현대사가 압축돼 있는 곳이다. 한국의 근대화를 도왔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가 몰려 있고, 병인박해의 쓰라린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절두산은 현재 사적(399호)으로 지정돼 있지만, 외국인 선교사 묘지는 지정되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곳은 국가가 나서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앞으로의 구정 목표는.

공덕동, 신촌, 홍대 등을 중심으로 상업 지역이 발전했지만, 마포의 발전 방향은 결국 ‘살기 좋은 주거지’다. 이를 위해서는 녹지·문화·복지시설·교육 등을 발전시켜야 한다. 아현뉴타운, 합정동균형발전촉진지구 등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용산선 지하화를 통해 지상에 녹지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축복이다. 금년 하반기에 신청사를 기공하는데, 현재 청사 터에 청소년 도서관을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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