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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실에도 빨갱이가 있다”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사춘기 소년과 유가족이 감내해야했던 고통의 30년

▣ 류이근 기자/ 한겨레 경제부 ryuyigeun@hani.co.kr

“‘니네 아빠는 간첩이지, 그래서 잡혀간 거야. 그렇지? …
간첩은 이렇게 목졸라 죽인대.’ 그 아이는 느닷없이 숨겨 갖고 있던 노끈을 꺼내어, 찬이의 목에 걸고 잡아당기려고 했다.”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70)씨의 소설 <금단의 땅> 가운데 한 부분이다.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 가혹한 것일까? 1975년 4월19일 ‘인혁당’ 사건으로 엮인 하재완(당시 43살)씨의 집 앞. 동네 아이들은 7살짜리에 불과한 하씨의 아들을 끌어내 목에 새끼줄을 매어 나무에 묶어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한다’고 하면서 ‘끔찍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날 대법원은 하씨를 비롯해 서도원(〃 52)·도예종(〃 51)·이수병(〃 37)·김용원(〃 39)·우홍선(〃 45)·송상진(〃 46)·여정남(〃 31)씨 등 8명에게 ‘사법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곤 다음날 새벽 4시 이들 여덟명은 형장의 이슬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국가권력의 폭력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과 살인에 그치지 않았다. 8명의 살아남은 아내와 아들딸들의 숨통도 죄어갔다.

줄기찬 감시와 폭력, 반복되는 이사…

하씨의 부인 이영교(71)씨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더듬거리며 “숨을 쉬니까, 살았다 싶었지”라며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남부럽지 않게 살던 이씨는 남편을 잃은 뒤 여성용 내복과 웃옷 등 온갖 잡화를 팔아 어렵사리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피해나갈 수 없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줄기찬 감시와 폭력이었다. 기관원들은 늘 집 앞을 기웃거렸다. 이씨는 79년 6월 카터 미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무려 17일 동안이나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인혁당 유가족들이 서울에 올라가서 시위를 할까봐 사실상 가택연금을 한 것이다. 또 이씨를 비롯한 인혁당 어머니들은 83년 대구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때 이유 없이 경찰에 붙들려가 14시간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다.

이씨는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뿌리를 내리는가 싶으면 ‘빨갱이 가족’이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져, 늘 이사를 재촉했다. 이웃들의 시선도 싸늘했다. 이씨는 “그 집 이제 문 닫았다. 저 애들을 다 어야꼬” 하는 주위의 값싼 동정과 질시가 제일 싫었다고 한다.

다른 유가족들의 삶도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송상진씨의 둘째아들 송철환(45)씨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교실 안에도 빨갱이가 있을 수 있다.” 교련 선생이 학교 수업시간에 자신을 노려보면서 내뱉은 말이다. 사춘기 송씨가 겪은 이러한 경험은 멍울로 남아 있다. 송씨는 이때 싹튼 국가와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이후 30년 동안이나 나라에서 걷어들이는 주민세를 내지 않고 있다.

송씨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이 아니다. 송씨는 “79년 남민전 사건이 터졌을 때 중앙정보부에서 어머니를 연행해, 한 인간의 인격과 여자의 성적인 모든 부분을 다 무너뜨리는 고문과 폭력을 자행했다”며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차분하게 얘기를 풀어가던 송씨가 갑자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송씨의 어머니는 당시 고문으로 온몸이 새까맣게 변해, 업혀나왔다고 한다. 다른 인혁당 어머니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가족 중 누구도 좀처럼 이런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한다.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탓이다.

인혁당 유가족들이 대체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군사정권 시절 피를 토하며 쏟아낸 억울함을 단 한줄, 단 한컷도 보도해주지 않았던 언론에 대한 불신도 크다. 이수병씨의 아들 이동우(35)씨는 해마다 4월이 되면 찾아드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계속 거절해왔다. 이씨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유가족들에게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라는 ‘뻔한’ 질문이 상처를 후벼파는 송곳으로 날아온다.

유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유가족들의 눈에 세상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이영교씨는 “어느 세월에 심중에 있는 말을 다하노. 완전한 민주화와 통일이 돼야 그때서야 웃으면서 울면서 다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오랫동안 닫아뒀던 마음의 문을 다 열지 않았다. 보안법 때문에 남편을 잃은 이씨는 지금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보안법을 보면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세상의 변화를 수긍하지 못한다. 이씨는 왼쪽 가슴에 ‘보안법 완전 폐지’라는 동그란 배지를 달고 다닌다.

8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의 주최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인혁당 희생자 30주기 추모제’ 행사가 열렸다. 아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행사 표어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진상규명·사과 무소식에 무뎌지고 지쳐간다

유가족들이 2002년 12월에 그토록 원했던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긴 했으나, 법원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또 같은 해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국정원은 3년이 지난 뒤 지난 2월에서야 과거사를 규명하겠다고 나섰다. 유가족들에겐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송철환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그래 한마디 던져가지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고 볼 수 있나? 사법 살인을 당한 분들이니까, 사법부의 양심을 회복한 판결이 다시 있어야 하고 가해자인 국가가 나서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8명의 삶을 앗아간 국가폭력에 봉사했던 국정원, 법원, 검찰 등 권력기관이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어떤 권력자도 아직 아무런 사과나 반성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세상은 조만간 재심이 이뤄지고 명예회복이 될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지칠 대로 지친 유가족들에겐 세상은 너무나 더디다.

대구에서 만난 50대 택시운전사는 인혁당 사건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이리 말하면 이거 같고, 저리 말하면 저게 옳은 것 같지만, 당시 빨갱이 새끼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또 다른 대구 시민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도 싶은데, 판단이 안 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거의 아픔을 보듬기에 앞서, 사람들의 뇌리에 주입된 ‘인혁당=빨갱이’라는 조작된 등식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가해자의 ‘침묵’은 살아있다

1974년 4월18일 중앙정보부는 유신 반대 등을 외쳤던 혁신계 인사들이 과거 인민혁명당을 재건한 뒤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해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고 발표했다. 권력기관과 언론은 당시 이를 ‘인혁당 사건’이라고 사람들이 부르게 만들었다.
이듬해 4월8일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를 덧씌워 도예종씨 등 8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지 불과 20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렀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꼬박 1만950일이 흘렀다.
8명의 유가족들은 30년 동안 ‘그때’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못했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인 국가는 지난 2002년 중앙정보부의 의한 조작된 사건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인정하기까지 무려 28년 동안 ‘그때’를 묻어뒀다. 또 당시 국가 폭력에 부역했던 판사·검사·중정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이 안 난다” “30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하겠냐”라며 잊고 있었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30년이란 세월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물리적 시간 이상의 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관계된 중요 인물은 당시 박정희를 꼭짓점으로 김종필 총리,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황산덕 법무장관, 김치열 검찰총장, 이용택 중정 6국장, 서종철 국방장관, 민복기 대법원장 등이다. 이 밖에도 60명의 다른 대법관과 판사, 검사, 중정 수사관 등이 사건에 직접 관여했다. 이들 가운데 지금껏 누구도 반성을 하거나 사죄를 구하지 않았다. 국가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인혁당 사건을 총지휘한 이용택씨는 ‘고문에 의한 조작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말도 안 된다”며 의문사위가 내린 판정조차 거부했다. 가해자들은 인혁당 사건을 잊거나 잊고 싶은 그들만의 ‘사실’로 박제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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