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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학대하려고 결혼하셨나요?

등록 2004-12-16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 필리핀 여성활동가 마리아와 오브리… 한국 내 필리핀 이주여성 인권침해 실태 조사 나서</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어느 파산한 한국 기업가의 책 제목은 필리핀 여성들에게 꼭 맞는 말이다. 하루 2천여명의 필리핀인이 외국에서 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다. 현재 지구촌에는 800여만명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퍼져 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해 한해 80억달러를 본국으로 송금한다. 필리핀 이주노동자의 80%는 여성이다. 한마디로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필리핀을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리핀이야말로 여성의 이주노동자화, 이주노동의 여성화란 말이 꼭 들어맞는 나라다. 물론 필리핀 여성들은 한국으로도 온다.

가정폭력·성적학대 시달리는 신부들

지난 10월 발표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여성 899명 중 81.2%(730명)가 필리핀 여성이다. 지난 한해 944명의 필리핀 여성이 한국 남성과 결혼했다. 중국, 베트남, 일본에 이어 네 번째. 이들 중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현실을 ‘모른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필리핀 여성들이 있다. 이들의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필리핀 여성들이 손을 잡았다.

마리아(40)와 오브리(31)는 지난 10월부터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여성 인권 실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필리핀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인 ‘칸룬간’(Kanlungan center)의 여성 활동가들이다. 이들의 조사활동은 의정부의 기지촌 여성자활공동체 두레방에서 실시하고 있는 연수활동의 일환이다. 이 프로그램은 아시아재단에서 후원한다. 오브리는 동두천·송탄 등을 돌며 기지촌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을 인터뷰했고, 마리아는 서울·대전·천안 등에서 국제결혼을 한 필리핀 여성들을 만났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과 이주노동자 본국의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연대 ‘운동’이다. 연수활동 코디네이터를 맡은 김엘리씨는 “이주여성의 인권 침해는 인력 송출국과 수입국이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한국의 상황을 필리핀에 알리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말했다.

마리아와 오브리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 문화에 혀를 내둘렀다. 마리아에게 “인터뷰하면서 어떤 경우가 가장 가슴이 아팠으냐”고 묻자 “대부분이 가슴 아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필리핀 여성이 가정폭력뿐 아니라 성적 학대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필리핀에서는 가정폭력이 드물다”며 “그래서 여성들의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의 현실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견주어도 열악하다. 2002년 대만에서 필리핀 여성 인권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 마리아는 “대만에서는 성적 학대를 당하면 부부 강간으로 고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한국은 아무리 성적 학대를 당해도 부부강간죄가 성립되지 않아 고발조차 할 수 없다.

오브리는 “연예인으로 한국에 온 여성들이 성매매로 내몰리고 있다”고 한숨을 지었다. 한국의 유흥업소 업주들이 여권 등을 압수하고 성매매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업주들이 정한 술 판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오브리는 “250~300달러의 월급을 받아도 여성들이 손에 쥐는 돈은 고작 40~60달러”라며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안고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유흥업소 취업하니 성매매 강요당해

마리아와 오브리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한국과 필리핀 양국 정부, 비정부기구(NGO), 연구자들에게 배포된다. 필리핀 이주여성을 위한 가이드북도 제작할 예정이다. 여성 인권 ‘후진국’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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